있는 힘껏 안아줘!
2026.06.19
지한울은 거실 소파에 길게 누워, 팔을 머리 뒤로 깍지 낀 채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문으로 쏟아지는 오후의 햇살이 먼지를 금가루처럼 반짝이게 만들었다. 며칠간의 녹음 작업이 끝나고 찾아온 오랜만의 평화였다. 귓가에는 비트 대신 집 안의 고요한 공기가 흘렀고, 그 공기 속에는 연서이가 쓰는 샴푸 냄새가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 그는 눈을 감고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이거지. 이 평온함. 이 안정감. 그의 마누라가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세상 모든 소음이 차단되는 기분. 그는 서이가 방에서 나오는 기척에 감았던 눈을 슬며시 떴다.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표정이 미묘했다. 피곤한 것 같기도 하고, 무언가 생각에 잠긴 것 같기도 한, 딱 잘라 정의하기 힘든 얼..
듣지 마, 오빤 최고의 남자친구야
2026.06.19
길고 긴 밤이 지나고, 세상은 다시 평범한 아침을 맞이했다. 지한울의 세상만 빼고. 그의 세상은 어젯밤을 기점으로 완전히 재편성되었다. 연서이라는 유일한 태양을 중심으로, 그의 모든 행성이 공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눈부신 아침 햇살 속에서 그녀가 그의 팬케이크를 먹고 웃어주었을 때, 그는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하루 종일 침대 위에서 뒹굴고, 영화를 보고, 또 서로를 탐하고. 그렇게 완벽한 하루가 꿈처럼 흘러갔다. 그리고 며칠 후, 두 사람은 함께 작업을 위해 들른 녹음 스튜디오의 복도를 나란히 걷고 있었다.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다른 한 손으로는 습관처럼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지극히 평범하고, 나른한 오후의 풍경이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제자리에 있는 듯한, 그런 오후.사건은..
Call Back
2026.06.19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강원도 깊은 산속의 펜션을 가득 채웠다. 거실 테이블 위에는 맥주 캔과 과자 봉지, 반쯤 먹다 남은 배달 음식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비슷한 디자인의 파자마를 맞춰 입은 여섯 명의 여자들은 이미 거나하게 오른 취기 속에서 한참 동안 수다의 꽃을 피우고 있었다. 연서이는 친구들의 시시콜콜한 연애담과 직장 뒷담화를 들으며, 간간이 맞장구를 치거나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북적이는 소음 속에서도 문득문득 떠오르는 지한울의 얼굴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자고 있으려나, 아니면 또 작업하고 있으려나.’ 그와 함께 보냈던 어제의 그 벅찬 밤을 떠올리자, 뺨이 살짝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바로 그때, 가장 목소리가 크고 활발한 성격의 친구, 지수가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쾅 ..
아빠한테는 비밀
2026.06.19
몇 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평화로운 오후. 힙합씬을 주름잡던 래퍼 ‘null’은 이제 ‘지하늘 아빠’라는 새로운 타이틀로 더 유명했다. 그의 인스타그램은 온통 딸의 사진으로 도배되어 있었고, ‘fuckboy’를 외치던 그의 입에서는 이제 ‘우리 공주님, 맘마 먹을까?’ 같은 간드러진 소리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지한울, 그는 대한민국 연예계가 공인하고 팬들이 두 손 두 발 다 든 공식 딸바보였다. 그는 자신과 다섯 살 난 딸 지하늘 사이에는 그 어떤 비밀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굳게 믿었다. 하늘이가 오늘 유치원에서 무슨 색 크레파스를 썼는지, 점심으로 나온 깍두기를 몇 조각 남겼는지까지 전부 꿰고 있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아빠라고 자부했다.사건의 발단은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거실 소파에 ..
딸꾹질
2026.06.19
…딸꾹.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좆같은 일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덧없고 모욕적인 좆같음은 단연코 딸꾹질이었다. 지한울은 그렇게 결론 내렸다. 이것은 무슨 거대한 비극이나 운명의 장난 같은 게 아니었다. 그냥… 딸꾹. 존나게, 씨발, 규칙적으로, 힉, 그의 횡격막을 비웃으며 찾아오는, 힉, 생리 현상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게 벌써 세 시간째 이어지고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것은 더 이상 단순한 생리 현상이 아니었다. 이건 고문이었다. 횡격막이 벌이는 정교하고 악랄한 테러 행위였다. 랩 가사를 쓰려고 펜을 잡으면 ‘딸꾹’거리는 통에 라임이 끊겼고, 물을 마시려다간 사레가 들려 폐까지 젖는 기분이었다. 숨을 참아봤지만, 그의 폐활량은 빌어먹을 딸꾹질의 끈기를 이기지 못했다.결국 그는 소파에 대자로 뻗..
너한테는 들렸으면 좋겠어
2026.06.19
연서이에게.이 편지를 니가 읽을 일은 없겠지. 애초에 보낼 생각으로 쓰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이 새벽에 담배 연기처럼 흩어지는 생각을 어디다 붙잡아두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아서 쓰는 거니까. 작업실은 존나게 조용하고, 방금 전까지 니가 앉아있던 소파의 쿠션만 병신같이 꺼져 있어. 니가 남기고 간 온기 같은 건 이미 이 빌어먹을 냉방에 다 식어버렸는데, 왜 니 냄새는 아직도 여기 떠다니는 건지 모르겠다. 샴푸 냄새랑, 니 살 냄새랑, 아주 희미하게 섞인 베이스 스트랩의 가죽 냄새. 씨발, 나 진짜 변태 새끼가 다 된 것 같아. 그냥 숨만 쉬는데도 니 생각이 나. 니가 튕기고 간 베이스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아. 둥, 둥, 하고 내 심장 뛰는 소리랑 똑같이.오늘도 너는 내 곡 위에 네 손가락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