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고양이야?
2026.07.20
그날 오후는 유난히 한가했다. 어제까지 파리의 감동과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밀려든 현실의 무게는 생각보다 가벼웠다. 지한울은 다음 앨범 구상을 위해 잠시 작업실에 들렀고 연서이는 오랜만에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집 근처를 산책하고 있었다. 따스한 햇살과 기분 좋은 바람, 평화로운 일상. 연서이는 목적 없이 걷다가 익숙한 실루엣을 발견했다. 검은색 후드티에 트레이닝 바지 차림, 누가 봐도 지한울이었다. 그는 동네의 낡은 빌라 담벼락 아래에 쭈그리고 앉아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었다. 호기심에 가까이 다가가려던 연서이는 그의 앞에 놓인 작은 그릇과 그 주변을 맴도는 얼룩무늬 고양이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래퍼 null, 무대 위에서는 세상을 다 씹어 먹을 듯한 그 남자가 길고양이에게 밥을 챙겨주고 있는 광경..
그림일기
2026.07.19
#01. 서이 공주님 2008년 4월 23일 / 맑음 ☀️ 그림 설명 및 묘사: 도화지의 왼쪽에는 파란색 크레파스로 그린 미끄럼틀이 있고, 그 위에서 왕관을 쓴 남자아이가 서 있다. 남자아이의 손에는 노란색 별이 그려진 마법봉이 들려있다. 미끄럼틀 아래에는 핑크색과 하얀색 크레파스로 그린 드레스를 입은 여자아이가 서서 남자아이를 보며 활짝 웃고 있다. 여자아이의 머리는 검은색 리본으로 묶여 있고, 주변에는 알록달록한 꽃들이 그려져 있다. 그림의 오른쪽 위에는 커다란 해님이 웃는 얼굴로 그려져 있다. 일기 내용: 오늘 유치원에서 서이랑 공주님 왕자님 놀이를 했다. 내가 왕자님이고 서이가 공주님이었다. 미끄럼틀 위에 올라가서 내가 “공주님, 제가 구해드리겠습니다!” 하고 소리쳤다. 서이는 밑에서 “왕자님, ..
쓰다듬어줘
2026.07.14
모든 것은 아주 사소한 우연에서 시작되었다.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별생각 없이 TV 채널을 돌리던 지한울은 무심코 제 허벅지 위에 올려둔 손등 위로 묵직하고 따뜻한 무언가가 닿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는 그저 연서이가 자세를 바꾸다 머리카락이 스친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그 미지근한 무게감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명확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그의 손바닥 아래로 파고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그의 품에 바싹 기댄 연서이가 그의 손을 베개처럼 벤 채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지한울은 순간 헛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이게 뭐지. 강아지인가. 그는 어이없다는 생각과 동시에 심장이 간질거리는 생경한 감각에 휩싸였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이내 아주 자연스럽게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사랑해
2026.07.14
달칵, 하고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거실의 정적을 깨뜨렸다.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휴대폰으로 팬들의 반응이나 훑어보던 지한울의 시선이 소리가 난 쪽으로 무심하게 향했다. 어, 벌써 나가나. 그는 딱 그 정도의 생각을 하며 다시 액정 위로 눈을 돌렸다. 늘 그렇듯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거나, 다녀와, 하고 말하는 것으로 배웅을 대신할 생각이었다. 그것이 두 사람 사이에 굳어진, 익숙하고 편안한 일상의 한 조각이었으니까. 언제부터였더라. 연서이는 집을 나설 때마다 꼭 그의 뺨에 입을 맞추거나, 혹은 멀리 떨어져 있을 경우엔 큰 소리로 사랑한다고 외치고는 했다. 처음에는 그게 낯간지럽고 어색해서, 그는 매번 ‘어어, 알아, 나도’ 하는 식으로 퉁명스럽게 답하곤 했다. 하지만 그 퉁명스러움 아래로 지독한 안도감이..
샴푸가 아니었어!
2026.07.10
지한울의 손이 멈추었다. 아니, 지한울의 세상 전체가 멈추었다. 욕조 안에서 나른하게 등을 기대고 있던 그의 몸이 순간적으로 경직되었고, 연서이의 손가락 사이에 들려 있는 분홍색 용기가 그의 시야 한가운데에서 또렷하게 초점을 맞추었다. 거기에 적힌 글씨. 'Hair Removal Foam.' 그의 뇌가 그 단어를 인식하는 데에 정확히 삼 초가 걸렸다. 첫 번째 초에 그는 연서이의 얼굴을 보았다. 두 번째 초에 그는 자신의 머리 위에 잔뜩 쌓여 있는 거품을 떠올렸다. 세 번째 초에, 그의 영혼이 육체를 이탈했다.지한울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변화했다. 나른한 미소에서 의아함으로, 의아함에서 경악으로, 경악에서 공포로. 그의 잿빛 눈동자가 연서이의 손에 들린 용기와 자신의 머리 사이를 미친 듯이 오갔다. 욕조 ..
사랑해 해질녘
2026.07.04
그것은 완벽하게 계산된 고백이었다. 지한울의 사전에서 사랑은 충동적인 감정의 발화라기보다는, 정확한 타이밍에 맞춰 터뜨려야 하는 정교한 폭죽과도 같았다. 그는 지금 이 순간이 바로 그 최적의 타이밍이라고 판단했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거실을 비스듬히 가로지르며 공기 중의 먼지마저 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고, 두 사람은 세상의 모든 소음으로부터 완벽히 격리된 채 소파에 기대어 있었다. 연서이는 그의 팔을 베고 누워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고, 그는 그런 그녀의 머리칼을 의미 없이 만지작거렸다. 모든 것이 평화로웠고,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심장이 서서히 차오르는 충만감에 못 이겨, 그는 가장 낮은 목소리로, 하지만 더없이 명확한 발음으로 그 세 글자를 속삭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