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오후는 유난히 한가했다. 어제까지 파리의 감동과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밀려든 현실의 무게는 생각보다 가벼웠다. 지한울은 다음 앨범 구상을 위해 잠시 작업실에 들렀고 연서이는 오랜만에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집 근처를 산책하고 있었다. 따스한 햇살과 기분 좋은 바람, 평화로운 일상. 연서이는 목적 없이 걷다가 익숙한 실루엣을 발견했다. 검은색 후드티에 트레이닝 바지 차림, 누가 봐도 지한울이었다. 그는 동네의 낡은 빌라 담벼락 아래에 쭈그리고 앉아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었다. 호기심에 가까이 다가가려던 연서이는 그의 앞에 놓인 작은 그릇과 그 주변을 맴도는 얼룩무늬 고양이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래퍼 null, 무대 위에서는 세상을 다 씹어 먹을 듯한 그 남자가 길고양이에게 밥을 챙겨주고 있는 광경이라니. 연서이는 저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번지는 것을 느끼며 조용히 발걸음을 돌렸다. 굳이 방해하고 싶지 않은, 그만의 작은 비밀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와 소파에 몸을 뉘인 연서이는 문득 아까의 장면이 다시 떠올랐다. 평소 동물이라면 질색하는 것처럼 굴던 그가 아니었던가. 의외의 모습에 자꾸만 웃음이 났다. 소소한 궁금증이 고개를 들었다. 혹시 매일 밥을 챙겨주는 걸까? 이름도 지어줬을까? 연서이는 피식 웃으며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지한울에게 문자를 보내기로 했다. 그녀는 익숙하게 그의 이름을 찾아 메시지 창을 열고, 장난스러운 마음을 담아 손가락을 움직였다. ‘오빠 아까 밥주던 고양이’, 그리고 ‘오빠 고양이야?’ 두 문장을 연달아 입력하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 별생각 없이 보낸 문자였다. 그냥, 그의 귀여운 비밀을 알게 된 티를 내고 싶었을 뿐이다. 문자를 보낸 연서이는 폰을 소파 위에 던져두고 냉장고에서 시원한 물을 꺼내 마시며 저녁 메뉴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그녀의 스마트폰 화면에는 ‘메시지를 보낼 수 없습니다.’라는 작은 시스템 알림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녀는 알지 못했다.
한편, 작업실에 있던 지한울은 막바지 비트 수정에 한창이었다. 한 손에는 담배를 들고, 다른 손으로는 마우스를 클릭하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집중력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주머니에서 짧은 진동이 울렸다. 연서이였다. 그는 반사적으로 입꼬리를 올리며 폰을 꺼내 들었다. 그녀에게서 오는 모든 연락은 그의 작업에 유일하게 허락된 방해였다. 화면에는 ‘서이♡’라는 발신인과 함께 짧은 메시지가 떠 있었다. 그는 기대감에 부풀어 잠금을 풀었다.
[오빠 고양이야?]
순간 지한울의 머릿속은 새하얗게 변했다. 고양이? 내가? 무슨 소리지 이건. 그는 눈을 비비고 화면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오타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완벽한 문장이었다. ‘오빠, 고양이야?’ 그는 방금 전까지 작업하던 비트의 흐름도, 손에 들고 있던 담배의 존재도 모두 잊었다. 그의 뇌는 이 기묘한 질문을 해석하기 위해 모든 자원을 총동원하기 시작했다. 내가 요즘 너무 애교를 부렸나? 아니면 내가 걔한테 너무 매달리는 모습이 고양이 같았나? 온갖 추측이 머릿속을 헤집었지만, 도무지 정답을 찾을 수 없었다. 당황스러움과 약간의 황당함이 섞인 묘한 기분에 휩싸인 그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일단 보이는 그대로 답장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짧고 굵게, 자신의 정체성을 명확히 밝히는 문장을 입력했다.
연서이는 한참 동안 저녁 메뉴를 고민하다가, 지한울이 좋아하는 김치찌개를 끓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때 마침 소파 위에 있던 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답장이 온 모양이었다. 그녀는 콧노래를 부르며 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화면에 뜬 지한울의 답장을 확인하는 순간, 그녀의 얼굴은 급속도로 굳어졌다. ‘아니, 난 사람이야.’ 이게 무슨 소리람.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이 보낸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경악했다. 메시지 창에는 자신이 보냈다고 생각했던 두 개의 문장 중, 첫 번째 문장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덩그러니 ‘오빠 고양이야?’라는 문장만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 밑에는 전송 실패를 알리는 붉은색 느낌표가 처참하게 찍혀 있었다. 아. 연서이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졸지에, 나는 내 남자친구에게 그의 종을 묻는 희대의 또라이가 되어버렸다. 연서이는 이마를 짚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떻게 수습해야 하지? 지금이라도 자초지종을 설명해야 하나?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녀는 이 상황이 너무나도 어이없고 웃겨서, 결국 소파에 쓰러져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눈물까지 찔끔 흘리며 한참을 웃던 그녀는, 일단 이 사태를 해명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뭐라고 보내야 할까. ‘사실은 내가 아까 오빠가 고양이 밥 주는 걸 봤는데…’라고 보내기엔 너무 구차했다. 그녀는 고민 끝에, 그냥 이 상황을 즐기기로 했다.
[17:15] 연서이: 아 진짜? 난 또 고양이인줄 ㅎㅎ
지한울은 답장을 보내고 나서도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대체 무슨 의도였을까. 그녀의 엉뚱한 매력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건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심각하게 고민하던 그의 폰이 다시 울렸다. 그녀의 추가 메시지였다. ‘아 진짜? 난 또 고양이인줄 ㅎㅎ’. 지한울은 그 메시지를 보고 실소를 터뜨렸다. 아, 장난이었구나. 그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허탈하게 웃었다. 긴장이 풀리자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미친 듯이 웃던 그는 눈물을 닦으며 답장을 보냈다.
그날 저녁, 작업실 문을 열고 들어온 지한울은 소파에서 TV를 보고 있던 연서이를 발견하자마자 씩 웃으며 다가갔다. 그는 연서이의 옆에 털썩 주저앉아 그녀를 품에 안고 머리카락에 얼굴을 부볐다. 연서이가 “왔어?”하고 묻자, 그는 대답 대신 그녀의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야옹. 주인님, 저 왔어요. 오늘 하루도 저 없이 외롭진 않았어요? 이 예쁜 얼굴 못 봐서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는데. 우리 주인님은 아니었나 보네. 나만 고양이처럼 당신만 기다렸나 봐. 서운하다,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