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콩깍지
    2026.07.02
    그것은 아주 평범하고, 나른하고, 그래서 약간은 지루하기까지 한 오후의 일이었다. 지한울은 거실의 거대한 소파에 제 몸을 거의 던지다시피 묻고, 의미 없이 스마트폰 액정만 스크롤하고 있었다. 어제 막 마감한 곡의 피로가 아직 덜 풀린 탓인지, 혹은 창밖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너무 따스한 탓인지, 그는 좀처럼 그 어떤 것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시끄러운 가십 기사, 어그로를 끄는 유튜브 썸네일, 지인들의 과시적인 인스타그램 포스팅 사이를 무감각하게 유영하던 그의 엄지손가락이 문득, 어느 한 지점에서 멈춰 섰다. 그것은 어떤 온라인 커뮤니티의 인기글이었다. 제목은 지극히 유치하고 통속적이었다. ‘당신이 진짜 콩깍지가 꼈는지 확인하는 방법 (99% 정확함)’. 지한울은 코웃음을 쳤다. 씨발, 무슨 이딴 걸 ..
  • 오빠가 사라지는 꿈 꿨어
    2026.06.28
    새벽의 푸른빛이 창문을 넘어와 방 안을 희미하게 밝히고 있었다. 지한울은 어젯밤 늦게까지 이어진 작업의 여파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세상의 모든 소음이 차단된 고요한 공간, 그의 의식은 무중력 상태처럼 부유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정적을 깨뜨리는 날카로운 노크 소리가 방문을 두드렸다. 똑, 똑. 간결하지만 집요한 소리였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잠결에 뒤척였다. 씨발, 어떤 새끼야. 이 새벽부터. 매니저인가? 그는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며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머리카락은 까치집처럼 엉망이었고, 잠에 취한 잿빛 눈동자는 초점이 흐릿했다. 그는 느릿하게 침대에서 내려와 어기적거리며 현관문이 아닌, 작업실 방문으로 향했다. 똑, 똑. 노크 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왔다. 이번에는 조금 더 다..
  • Interview
    2026.06.28
    카메라 플래시가 연달아 터지는 소음이 멎고, 잠시 휴식 시간을 갖기 위해 촬영이 중단되었다. 스태프가 건네주는 생수를 받아든 지한울은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조명으로 달아오른 공기와 셔터 소리로 가득했던 공간이 잠시 정적에 잠긴다. 곧이어 인터뷰를 담당할 기자가 그의 맞은편에 앉아 녹음기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짤깍,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녹음이 시작되고, 기자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스튜디오의 정적을 깼다.Q1. 안녕하세요, null 씨. 먼저 오늘 화보 촬영 정말 멋졌습니다. 최근 가장 뜨거운 아티스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아, 감사합니다. 늘 하던 대로 지내고 있습니다. 작업하고, 가사 쓰고, 가끔 놀고. 똑같죠, 뭐. 최근에 좀 바빠지긴 했는데, 그래도 즐기면서 ..
  • 2026.06.26
    사건의 발단은 지극히 사소했다. 냉장고 문을 제대로 닫지 않은 것. 그것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지한울은 ‘아, 씨, 문 열렸네.’ 하고 투덜거리며 닫고 말았을 일이었다. 하지만 하필이면, 정말이지 하필이면, 어제 사다 놓은 최상급 한우 안심이 냉장고 안에서 미지근한 공기를 쐬고 있는 장면을 목격한 순간, 그의 내면에 잠들어 있던 꼰대 유전자가 발현하고야 말았다. 그는 다짜고짜 거실 소파에 누워 휴대폰을 보던 연서이를 향해 선전포고를 날렸다. 그의 목소리는 래퍼로서 단련된 발성 덕분에 불필요하게 거실 전체를 쩌렁쩌렁 울렸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마치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피의자를 심문하는 형사처럼 연서이 앞에 섰고, 그의 잔소리는 웬만한 비트 없는 랩 벌스처럼 쉴 새 없이 쏟아졌다...
  • 연서이 중독
    2026.06.26
    지한울, 혹은 래퍼 null은 스스로를 꽤나 이성적이고 통제력이 강한 인간이라고 여겼다. 적어도 음악과 일에 있어서는 그랬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가사의 재료로 사용하고 무대 위에서 상품으로 포장하여 판매하는 일에 능숙했다. 사랑, 분노, 우울, 환희. 그 모든 것은 결국 돈이 되는 단어의 조합이었고, 그는 그 단어들을 조합하는 장인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 단단했던 자아의 경계선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모든 감정의 근원과 목적지가 단 한 사람, 연서이라는 존재를 향하게 되면서부터였다. 그 자각은 늦은 밤, 홀로 남은 작업실의 적막 속에서 불쑥 찾아왔다. 방금 끝낸 믹싱 작업의 피로감보다 더 짙게, 그의 온몸을 잠식하는 것은 이유 모를 허전함과 그녀를 향한 지독한 그리움이었다. 그는 마..
  • 빈틈없이, 단단하게
    2026.06.24
    녹음실의 두꺼운 방음 문이 열리고, 지한울은 익숙한 복도의 형광등 불빛 아래로 걸어 나왔다. 길고 지루했던 믹싱 작업이 끝난 후의 나른한 피로감이 어깨를 짓눌렀지만, 그의 발걸음은 이상하리만치 가벼웠다. 복도 끝, 통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어스름한 저녁 하늘 아래, 익숙한 실루엣이 가로등 불빛에 기대어 서 있었다. 연서이. 그 이름 세 글자가 그의 뇌리에 박히는 순간, 온종일 그를 잠식했던 음악과 소음이 거짓말처럼 멀어지고 세상은 오직 저 하나의 점을 향해 수렴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숨기지 않은 채, 그녀를 향해 걸음을 서둘렀다. 빨리 가서 품에 안고, 그녀의 샴푸 향을 맡고, 오늘 하루가 얼마나 좆같았는지, 그리고 네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투덜거리고 싶었다. 그의 세상은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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