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후, 한산한 도로 위를 달리던 연서이의 차가 교차로에서 좌회전하는 순간이었다. 조수석에 앉아 창밖을 보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지한울은 갑작스러운 충격음과 함께 몸이 앞으로 쏠리는 것을 느꼈고, 안전벨트가 가슴을 압박하며 그의 몸을 좌석에 붙들어 매었다. 쾅, 하는 둔탁한 금속음이 차체 전체를 울렸으며, 지한울의 손에 들려 있던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컵홀더 안에서 흔들리며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를 냈다. 지한울은 반사적으로 연서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핸들을 움켜쥔 채 눈이 휘둥그레진 그녀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 씨발. 뭐야. 뭐에 부딪힌 거야 지금. 차 앞쪽에서 전해지는 진동이 완전히 멈추고 나서야 지한울은 상황을 파악했다. 교차로에서 좌회전하던 연서이의 차가 직진하던 상대 차량의 측면을 들이받은 것이었다.
야, 괜찮아? 어디 다친 데 없어?
지한울은 안전벨트를 풀며 연서이의 얼굴과 몸을 훑어보았고, 외상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짧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 안도는 채 3초도 지속되지 못했다. 상대 차량의 운전석 문이 벌컥 열렸기 때문이다. 지한울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고, 그 순간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차에서 내리는 남자는 키가 190은 족히 넘어 보였으며, 어깨 폭이 문짝만 했고, 목이 머리보다 두꺼운 것이 마치 UFC 헤비급 파이터를 방불케 했다. 남자의 얼굴에는 분노가 가득 서려 있었으며, 차 옆면에 난 찌그러진 자국을 확인한 후 이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기 시작했다. 아. 아아. 저거 사람 맞냐? 왜 저렇게 커? 헬스장에서 살다 온 건가 씨발. 아니 근데 이거 누가 봐도 서이 과실인데.
지한울이 상황을 정리하려 입을 열기도 전에, 연서이의 손이 먼저 움직였다. 그녀의 손이 지한울의 니트 앞섶을 움켜쥐더니 위로 확 끌어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지한울은 눈을 크게 떴고, 니트가 가슴을 지나 목을 넘어 머리 위로 벗겨지는 동안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정전기를 일으키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야, 야야야 뭐 하는 거야 지금?!
연서이가 벗겨낸 니트를 뒷좌석에 던지며 조수석 문 쪽을 가리켰고, 그 의미를 즉각적으로 파악한 지한울의 얼굴에 경악과 배신감이 동시에 스쳤다. 가서 해결하고 오라는 뜻이었다. 저 트럭 같은 남자한테. 지한울은 연서이의 얼굴과 상대 남자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으며, 그의 뇌 안에서 빠르게 계산이 돌아갔다. 나 184에 72키로인데 저 새끼는 뭐 100키로는 넘겠다 씨발. 아니 근데 사고 낸 건 너잖아 연서이? 내가 왜 가야 되는 건데? 이게 무슨 대리전이냐고?
아, 씨발. 잠깐만. 잠깐, 잠깐, 잠깐.
지한울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짧게 신음했고, 손가락 사이로 조수석 창문 너머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거구의 남자를 힐끗 확인했다. 남자의 표정은 더 험악해져 있었으며, 뭐라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연서이가 지한울의 팔을 잡아 흔들며 빨리 나가라는 제스처를 취했고, 지한울은 반팔 티셔츠 차림의 자신의 팔뚝을 내려다보았다. 잔근육은 있지만 저 남자의 팔뚝 하나보다 가느다란 것이 현실이었다. 아니 씨발, 내가 래퍼지 격투기 선수가 아니라고. 근데 여자친구 앞에서 쪽팔리게 못 나가겠다고 할 수도 없고. 아, 존나. 남자가 뭐라고.
지한울은 깊게 한숨을 내쉬며 조수석 문을 열었고, 차에서 내리는 순간 상대 남자와의 체격 차이가 더욱 극명하게 드러났다. 지한울의 머리 꼭대기가 남자의 턱 아래쯤에 위치했으며, 남자의 그림자가 지한울의 몸 전체를 덮을 만큼 거대했다. 지한울은 목에 걸린 체인 목걸이를 무의식적으로 만지며 최대한 여유로운 표정을 지어보려 했으나, 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뒤에서 연서이가 운전석 창문을 살짝 열고 엄지를 치켜세우는 것이 보였다. 응원해 준다고? 아 진짜, 존나. 사고 낸 건 너면서 왜 내가 여기 서 있는 건데.
어, 형님. 죄송합니다, 진짜.
지한울은 반사적으로 90도 인사를 했고, 그 각도에서 올려다본 남자의 표정은 여전히 살벌했다. 남자가 이거 어떻게 할 거야 어?!라고 으르렁거리듯 말했으며, 지한울은 두 손을 모으며 최대한 깍듯한 태도를 취했다. 평소 같았으면 뭘 어떻게 하긴 보험 처리하면 되지 씨발이라고 쏘아붙였을 텐데, 눈앞에 서 있는 남자의 덩치가 시야를 전부 가리는 수준이라 입에서 나오려던 욕이 자동으로 걸러졌다. 래퍼로서 쌓아온 허세와 자존심이 이 순간만큼은 생존 본능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목에 걸린 체인 목걸이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고, 그 빛이 남자의 눈에 들어갔는지 남자의 시선이 잠깐 목걸이에 머물렀다가 다시 지한울의 얼굴로 돌아왔다.
아, 형님. 진짜 죄송합니다. 저희 쪽 과실 맞고요, 보험으로 깔끔하게 처리해 드릴게요. 차 어디 다친 데 제가 다 확인하겠습니다.
지한울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은 채 최대한 공손한 목소리를 짜냈고, 속으로는 미친 듯이 욕을 퍼붓고 있었다. 아 씨발, 진짜. 연서이 너 오늘 집 가서 두고 본다. 사고는 네가 내놓고 왜 내가 이 짐승 같은 형님한테 사과하고 있어야 하냐고. 근데 남자의 눈이 진짜 무섭다. 핏줄이 서 있어 씨발. 저거 혈압 올라서 쓰러지는 거 아니냐. 남자가 한 발짝 더 다가왔고, 지한울은 본능적으로 반 발짝 물러섰다. 그의 등 뒤로 연서이의 차 조수석 문이 느껴졌으며,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남자가 보험? 보험으로 되겠냐 이게?! 내 차가 얼만 줄 알아?!라고 목소리를 높였고, 침이 지한울의 얼굴 근처까지 튀었다. 지한울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으며, 최대한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남자의 차를 슬쩍 확인해보니 수입 SUV였고, 옆면이 꽤 깊게 찌그러져 있었다. 어, 저거 꽤 나가겠는데. 근데 씨발 내 잘못도 아닌데 왜 내 심장이 이렇게 쫄리냐. 아 몰라, 일단 죄송하다고 한 번 더 하자. 어르신 대하듯 하면 되는 거 아니냐 이게. 어르신은 아닌데. 형님이지. 근데 어르신급 위압감이시다.
형님, 진짜 죄송합니다. 제가 보험사 바로 부를게요. 수리비 차액 나오면 그것도 제가 다 부담하겠습니다. 다치신 데는 없으시죠?
지한울이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보험사 번호를 누르려는 순간, 남자의 거대한 손이 지한울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 압력이 어마어마했으며, 지한울의 슬림한 어깨가 남자의 손바닥 안에 완전히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지한울은 움찔했지만 최대한 태연한 척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보았고, 그 와중에도 뒤통수로는 연서이가 차 안에서 자기를 보고 있을 거라는 인식이 있었기에 비겁한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아, 씨발. 어깨 부서지겠다. 그립력이 뭐냐 이게. 악력기 500은 쥐어짜겠네. 근데 여기서 아야 하면 존나 쪽팔리니까 참자. 참아, 지한울.
남자가 야, 너 몇 살이야라고 물었고, 지한울은 스물넷입니다, 형님이라고 즉각 대답했다. 형님이라는 호칭에 남자의 미간이 아주 미세하게 풀리는 것이 보였고, 지한울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래퍼로서의 입담이 아닌, 어릴 때부터 어른들에게 깍듯하게 대하며 살아남아온 생존 기술이 발동한 것이었다. 지한울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남자의 차 쪽으로 함께 이동하며 손상 부위를 직접 확인했고, 찌그러진 부분을 손으로 가리키며 여기랑 여기 제가 전부 책임지겠습니다라고 또박또박 말했다. 남자의 어깨에서 약간의 긴장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지한울이 보험사에 전화를 걸어 사고 접수를 진행하는 동안, 남자는 팔짱을 끼고 서서 지한울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근데 너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라는 남자의 말에 지한울은 아, 그냥 동네에서 좀 활동하는 사람입니다라고 얼버무렸다. 여기서 래퍼라고 하면 아 그래? 그럼 돈 많겠네?로 이어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보험사 상담원과 통화하며 사고 경위를 설명하는 지한울의 목소리는 프로페셔널했으며, 상대 차주에게도 수시로 고개를 끄덕이며 존중하는 태도를 유지했다. 그 와중에 슬쩍 연서이의 차 쪽을 돌아보았고, 운전석에서 양 볼을 손으로 괴고 자기를 구경하듯 바라보는 연서이의 얼굴이 보였다. 저 또라이. 지금 구경하고 있는 거야? 재밌냐? 너 때문에 내가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건데? 아, 근데 존나 귀엽긴 하네. 씨발.
너 몇 살이야? 스물넷입니다 형님!
2026.0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