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한울은 펜트하우스 거실의 푹신한 소파에 몸을 파묻은 채 한가로운 오후를 만끽하고 있었다. 막 샤워를 마친 뒤라 머리카락은 아직 물기를 머금은 채였고, 편안한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넷플릭스 신작 목록을 무의미하게 스크롤하는 중이었다. 창밖으로는 서울의 스카이라인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지만, 지금 그의 관심은 오직 오늘 저녁 연서이와 함께 무엇을 먹을지에 쏠려 있었다. 아침에 줬던 블랙카드를 들고 친구 만나러 나간 서이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예쁜 카페에 가서 맛있는 디저트라도 먹고 있으려나. 아니면 백화점에 들러서 그동안 눈여겨봤던 가방이라도 하나 샀을까. 뭘 하든 서이가 즐거우면 그걸로 족했다. 돈은 또 벌면 되는 거니까.
‘내 여자는 내가 먹여 살린다’는 신조를 가진 지한울에게 있어 연서이가 자신의 카드를 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며, 오히려 그녀가 돈을 쓸 때마다 이상한 만족감과 뿌듯함마저 느껴졌다. 카드 내역에 찍히는 액수가 클수록 ‘역시 내 여자, 씀씀이도 남다르네’ 같은 멍청한 생각을 하며 혼자 실실 웃는 것이 그의 소소한 즐거움 중 하나였다. 그래서 지한울은 소파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던 자신의 휴대폰이 ‘띠링-’ 하고 경쾌한 알림음을 울렸을 때, 반사적으로 입꼬리를 올리며 화면을 켰다. 분명 서이가 보낸 귀여운 이모티콘이 담긴 메시지이거나, 카드 결제 알림일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말이다.
아, 우리 자기 벌써 돈 썼네. 뭘 샀으려나. 백만 원? 어, 옷 샀나. 귀엽기는.
지한울은 가벼운 혼잣말과 함께 잠금 화면에 뜬 알림 메시지를 확인했다. 예상대로 카드사에서 보낸 알림이었지만, 내용은 그의 예상을 살짝 벗어나 있었다. [KB카드] 지한울님, 13:05 ATM 출금 1,000,000원. 결제 내역이 아니라 출금 내역이라는 점이 조금 의아했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친구랑 같이 있다가 현금이 필요할 수도 있지. 어쩌면 친구에게 돈을 빌려줘야 하는 상황일지도 모르고. 속 깊은 서이가 친구의 딱한 사정을 모른 척할 리 없었다. 지한울은 ‘역시 마음도 예쁘다니까’라며 다시 넷플릭스로 시선을 돌리려 했다. 하지만 그의 엄지손가락이 리모컨에 닿기도 전에, 휴대폰이 다시 한번 ‘띠링-’ 하고 울렸다. [KB카드] 지한울님, 13:06 ATM 출금 1,000,000원. 1분 간격으로 똑같은 금액이 또 출금되었다.
뭐야, 씨발. 오류인가? ATM 기계가 돈을 뱉다가 렉 걸렸나.
지한울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방금 전까지 서이를 향해 헤실거리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잿빛 눈동자에는 미세한 의문이 떠올랐다. 1분 만에 백만 원을 또 뽑았다고? 혹시 기계가 고장 나서 돈이 나오지 않아 다시 시도한 걸까. 아니면 백만 원 단위로만 출금이 되는 구형 기계인가. 여러 가지 가능성을 떠올리며 상황을 합리화하려 애쓰는 순간, 그의 가설을 비웃기라도 하듯 휴대폰이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했다. 띠링. 띠링. 띠링. 띠링. 화면을 가득 채우는 알림 팝업은 전부 똑같은 내용이었다. [KB카드] 지한울님, 13:07 ATM 출금 1,000,000원. [KB카드] 지한울님, 13:08 ATM 출금 1,000,000원. [KB카드] 지한울님, 13:09 ATM 출금 1,000,000원...
아니, 잠깐만. 이게 지금… 뭔 개지랄이야?
지한울은 저도 모르게 소파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의 손에 들린 휴대폰은 마치 발작을 일으키는 것처럼 쉴 새 없이 진동하며 출금 알림을 뱉어내고 있었다. 1분, 아니 이제는 30초 간격으로 백만 원씩, 마치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것처럼 돈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은 새하얗게 변했다. 설마. 아니겠지. 우리 서이가? 그 순하고 착한 연서이가 지금 ATM 기계 앞에서 버튼을 광클하며 자기 통장을 털고 있다고? 지한울은 눈앞의 현실을 부정하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이건 뭔가 잘못됐다. 분명 카드 복제 사기 같은 거다. 그래, 그거 말고는 설명이 안 돼. 당장 카드사에 전화해서 정지시켜야…
그의 모든 혼란과 부정, 합리적인 의심을 한 방에 날려버리는 연서이의 메시지가 화면 상단에 나타났다. 천만 원 정도만. 사랑해. 하트 이모티콘. 지한울은 그 문장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헛것을 본 게 아니었다. 분명히 ‘천만 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 붙은 앙증맞은 하트는 마치 그의 텅 비어가는 통장을 향한 조롱처럼 느껴졌다. 순간, 지한울은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냥… 멍했다. 소파에 주저앉은 그는 허공을 응시하며 쉴 새 없이 울리는 휴대폰을 손에 쥔 채 굳어버렸다. 띠링, 띠링, 띠링… 출금 알림은 여전히 멈추지 않고 그의 멘탈을 착실하게 파괴하고 있었다.
…천만 원? 지금 저 귀여운 얼굴로 ATM 기계 앞에서 백만 원씩 연타하고 있다는 거야? 내 돈을? 하… 씨발, 이게 맞나. 아니, 서이가 돈이 필요하다는데 내가 뭘 어쩌겠어. 줘야지. 암, 주고말고. 근데 왜 하필 출금이야. 계좌이체를 해주면 되는데. 왜 저렇게 힘들게… 아니, 힘든 건 내 통장인가. 잠깐만, 그럼 지금 총 얼마를 뽑은 거야. 하나, 둘, 셋… 씨발, 벌써 팔백? 곧 천만 원 채우겠네. 야, 진짜 알뜰하게 뽑는다. 수수료는 생각 안 하나? 아, 내 카드 수수료 면제지.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이걸. 미치겠네 진짜. 지한울, 정신 차려. 네 여자친구가 돈 쓴다는데 뭘 그렇게 벌벌 떨어. 남자가 쩨쩨하게. 그래, 천만 원. 까짓거. 하룻밤 술값이네. 근데 왜 이렇게 심장이 떨리지. 이게 사랑인가? 사랑은 돈으로 증명하는 거랬나? 아닌데 씨발. 존나 아까운데. 아니, 안 아까워. 사랑해 서이야. 마음껏 뽑아. 이왕이면 기계 한도까지 다 뽑아버려. 아냐, 그건 좀. 적당히 해, 자기야. 제발. 오빠 굶어 죽어. 아니, 안 죽어. 죽어도 돼. 너만 행복하다면. 아, 씨발!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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