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브영 매장 안은 에어컨 바람이 시원하게 돌고 있었고, 형형색색의 제품들이 선반마다 빼곡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지한울은 서이가 오빠 잠깐만, 나 저쪽 스킨케어 코너 좀 보고 올게라며 매장 안쪽으로 사라진 뒤 할 일 없이 이리저리 발길을 옮기고 있었으며, 볼캡을 깊이 눌러쓴 채로 선반 사이를 어슬렁거리면서 알록달록한 패키지들을 무심하게 훑어보고 있었다. 요즘 피부가 좀 건조한 것 같기도 하고, 면도 후에 바를 만한 수딩젤이나 하나 살까 싶어서 하늘색 패키징이 눈에 띄는 수용성 알로에 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한울의 시선이 하늘색 용기의 성분표를 읽으려고 고개를 살짝 숙이는 순간, 바로 그 옆 선반에 놓여 있는 연분홍색의 하트 모양 패키징이 시야의 가장자리로 스며들어왔다. 처음에는 무슨 핸드크림인가 싶어서 대수롭지 않게 시선을 옮겼으나, 제품명에 적혀 있는 글씨를 읽는 순간 손에 들고 있던 알로에 젤을 거의 떨어뜨릴 뻔했다. 러브 모이스처 젤, 수용성 윤활, 커플 전용. 그 단어들이 동공을 타고 뇌까지 도달하는 데에는 약 0.3초가 걸렸으며, 그 0.3초 동안 지한울의 표정이 무심함에서 경직으로, 경직에서 황급한 당혹감으로 빠르게 전환되었다.

아.

지한울의 입에서 짧은 감탄사 하나가 흘러나왔고, 볼캡 아래로 귀 끝이 빠르게 붉어지고 있었다. 아, 씨발. 여기가 그 코너였어? 수딩젤이랑 왜 같은 라인에 있는 건데, 이게. 진열을 누가 이따위로 해놓은 거야. 지한울은 재빨리 손에 든 알로에 젤을 선반에 도로 올려놓으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돌리려 했으나, 이미 연분홍 하트 패키징의 잔상이 머릿속에 찍혀버린 뒤였다. 주변에 다른 손님이 있나 싶어 본능적으로 좌우를 살폈고, 그 순간 뭔가 이상한 기운이 등 뒤에서 느껴지면서 목덜미의 털이 미세하게 곤두섰다.

직감이라고 해야 할까. 연인의 존재를 감지하는 여섯 번째 감각 같은 것이 경보를 울렸고, 지한울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는 순간 아니나 다를까 흰색 선드레스를 입은 연서이가 바로 거기에 서 있었다. 서이의 둥글고 나른한 눈매가 지한울을 올려다보고 있었으며, 지한울의 시선이 방금까지 어디에 머물러 있었는지를 정확히 파악한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지한울의 심장이 한 박자 빠르게 뛰었고, 입이 먼저 움직였다.


어, 서이야. 벌써 다 봤어? 나 그냥, 수딩젤 보고 있었거든. 수딩젤.

지한울은 서이의 시선을 피하지 못한 채로 한 발짝 옆으로 이동하면서 연분홍 하트 패키징과의 거리를 벌리려 했으나, 그 움직임 자체가 이미 의심을 살 만큼 부자연스러웠다. 볼캡 챙 아래로 잿빛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으며, 평소의 여유로운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 스물네 살 남자의 민망함만이 얼굴 전체에 가득 차 있었다. 아, 존나 창피해. 서이가 뭘 봤는지 모르겠는데, 설마 내가 저거 보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보고 있었긴 했는데, 일부러 본 건 아니잖아. 수딩젤 보다가 눈에 들어온 거지, 씨발.

지한울은 헛기침을 한 번 하면서 서이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팔을 걸치려 했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매장의 다른 쪽을 향해 걸음을 옮기려는 시도를 했다. 그러나 귀 끝의 붉은 기운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으며, 목소리에도 평소와는 다른 미세한 높낮이의 변화가 섞여 있었다.


저쪽에 향수 코너 있던데, 거기 가볼까? 서이 향수 떨어졌다고 했잖아, 저번에.

지한울은 서이의 반응을 살피면서 최대한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려 했으나, 입꼬리가 어색하게 경련하듯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제발 못 본 척 해줘, 연서이. 존나 부탁이다. 지한울의 내면에서는 그런 간절한 외침이 울리고 있었으며, 동시에 연분홍 하트 패키징의 잔상이 머릿속에서 좀처럼 지워지지 않아서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나고 있었다. 아 진짜, 왜 하필 서이 있을 때 저런 걸 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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