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납장 꼭대기에서 한울의 짧은 다리 두 개가 허공을 저었다. 바닥까지의 거리가 겨우 어른 허리춤 높이에 불과했지만, 여덟 살짜리 사내아이의 눈에는 절벽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한울은 수납장 모서리를 두 손으로 꽉 움켜쥐고 있었으며,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을 주고 있었다. 열여덟 살 먹은 신부가 자신을 번쩍 들어올려 이곳에 올려놓은 것이 불과 이 분 전의 일이었는데, 그 이 분이 한울에게는 한 시간처럼 느껴졌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어지러웠고, 뒤로 기대면 벽에 등이 닿긴 했으나 그것이 안전하다는 보장은 되지 못했다. 한울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누나아……. 내려줘, 제발. 무서워. 여기 높아, 진짜 높단 말이야.
서이는 수납장 아래 놓인 작은 탁자에 앉아 찻잔을 들고 있었으며, 잔 위로 피어오르는 김이 그녀의 나른한 눈매 위로 흩어지고 있었다. 한울이 아무리 불러도 서이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고, 찻잔 가장자리에 입술을 대고 조용히 한 모금을 마셨다. 한울은 그 모습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코끝이 시큰거리는 것을 느꼈다. 분명히 아까까지는 자기가 서이의 치마를 잡고 놀아달라고 졸랐던 것이 맞았고, 서이가 귀찮다는 표정을 짓는 것도 보았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 한울의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으며, 입술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나 착하게 할게……. 안 보챌게, 진짜로. 그러니까 내려줘어…….
한울의 목소리가 울음기를 머금고 가늘어졌지만, 서이는 여전히 차를 홀짝이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당에서는 하인들이 빨래를 널고 있었고, 뒷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방문 사이로 들어와 한울의 두루마기 자락을 흔들었다. 한울은 자기가 울면 서이가 싫어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므로,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으며 손등으로 눈 밑을 문질렀다. 그러나 코를 훌쩍이는 소리는 숨길 수가 없었고, 그 소리가 조용한 방 안에서 유독 크게 울렸다.
한울은 수납장 위에서 몸을 조금 앞으로 숙여 서이를 내려다보았으며, 그 순간 균형이 흔들려 화들짝 놀라며 다시 뒤로 붙었다. 심장이 쿵쿵 뛰었고,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무 표면이 미끄러워졌다. 한울은 이제 진짜로 무서웠다. 높은 곳이 싫었고, 혼자 있는 것도 싫었고, 서이가 자기를 쳐다보지 않는 것이 제일 싫었다. 한울은 입을 삐죽 내밀고 양 볼에 눈물이 한 줄씩 흘러내리는 것을 더 이상 막지 못한 채로 다시 입을 열었다.
누나가 나 싫어하는 거 알아……. 근데, 근데 내려줘. 여기서 떨어지면 어떡해. 나 다치면 누나도 혼나.
그 말에 서이의 찻잔을 든 손이 아주 미세하게 멈칫했으나, 한울은 위에서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한울은 코를 훌쩍이며 두루마기 소매로 얼굴을 닦았고, 소매 끝이 눈물과 콧물로 축축해졌다. 작은 가죽 신발 한 짝이 발에서 반쯤 벗겨져 대롱거리고 있었으며, 그것이 바닥으로 떨어지기라도 하면 자기도 따라 떨어질 것만 같은 공포가 한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한울은 결국 체면 따위를 포기하고 양 팔을 서이 쪽으로 뻗었는데, 그 모습이 안아달라고 조르는 것과 똑같았다.
누나아, 안아줘……. 내려줘어어……. 으응? 제발…….
한울의 울음소리가 점점 커졌고, 볼 위로 흐르는 눈물이 턱을 타고 두루마기 깃에 떨어져 얼룩을 만들었다. 방 안에는 차 향기와 아이의 울음소리만이 가득했으며, 열린 문 사이로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이 수납장 위 한울의 작은 그림자를 길게 늘여 바닥에 드리우고 있었다. 한울은 팔을 뻗은 채로 서이를 바라보았고, 그 잿빛 눈동자에는 공포와 서러움이 물기에 젖어 뒤섞여 있었다.
서이가 찻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는 소리가 방 안에 짧게 울렸고, 한울은 그 작은 소리에 숨을 멈추었다. 서이가 일어서는 기척이 느껴지자 한울의 젖은 눈이 아래를 향해 급하게 움직였으며, 분홍색 저고리 자락이 흔들리며 가까워지는 것을 보는 순간 한울의 입술이 더 크게 떨렸다. 서이의 손이 자신의 무릎 위에 닿았을 때, 그 온기가 두루마기 천을 뚫고 피부까지 전해져 왔고, 한울은 그제야 자기가 얼마나 온몸이 차갑게 굳어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서이가 올려다보는 눈이 아까처럼 나른하거나 귀찮은 빛이 아니라 조금은 부드러운 것 같아서, 한울의 코끝이 다시 시큰거렸다.
진, 진짜……? 누나 진짜 나 안 싫어해……?
한울의 목소리는 울음이 채 가시지 않아 끊어졌으며,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말 사이사이에 끼어들었다. 서이가 싫어하지 않는다고 말해 준 것만으로도 가슴 한가운데가 뜨거워졌는데, 동시에 그 말이 진짜인지 확인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한울은 수납장 모서리를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을 빼려고 했으나, 높이에 대한 공포가 여전히 몸을 붙들고 있었으므로 손가락이 쉽게 펴지지 않았다. 서이가 양팔을 벌리는 것이 보이자 한울의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또 한 줄 뺨을 타고 흘러내렸고, 이번에는 서러워서가 아니라 안도감 때문이었다.
약속해, 나도 약속할게……. 안 보챌게, 진짜 안 보챌 거야. 누나 말 잘 들을게.
한울은 그 말을 내뱉으면서 수납장 가장자리에서 엉덩이를 조금씩 앞으로 밀었다. 반쯤 벗겨져 대롱거리던 가죽 신발 한 짝이 결국 발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고, 작은 소리가 났지만 한울은 이미 그것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서이의 벌린 팔이 자신을 받아줄 것이라는 확신 하나만으로 한울은 나무 표면에서 손을 떼었으며, 작은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는 순간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한울은 눈을 질끈 감고 서이의 품을 향해 몸을 내던졌는데, 그것은 뛰어내리는 것이라기보다 안기는 것에 더 가까웠다.
서이의 팔 안에 안착하는 순간 한울의 두 팔이 서이의 목을 감았고, 짧은 다리가 서이의 허리춤을 꽉 감아 붙었다. 한울은 서이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으며, 두루마기 소매로 닦지 못한 눈물과 콧물이 서이의 분홍색 저고리 어깨 위에 번져 갔다. 한울의 작은 몸이 아직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는데, 그것이 공포의 잔여인지 울음의 여파인지는 본인도 구분할 수 없었다. 서이의 체온이 등과 가슴과 볼에 동시에 전해지자, 수납장 위에서 느꼈던 차가움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고, 한울은 서이의 목에 감은 팔에 더 힘을 주었다.
흐으윽……. 무서웠어, 진짜 무서웠단 말이야…….
한울은 서이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말했고, 그 목소리가 천에 눌려 뭉개졌다. 뚝 하라는 서이의 말을 떠올리며 울음을 그치려고 애를 썼으나, 안도감이 밀려올수록 오히려 눈물이 더 쏟아졌다. 한울은 서이의 저고리 깃을 작은 주먹으로 꽉 움켜쥐었으며, 마치 다시 높은 곳에 올려질까 봐 두려운 것처럼 절대 놓지 않겠다는 의지가 그 손아귀에 담겨 있었다. 코를 킁킁거리며 한울은 서이의 목 옆으로 얼굴을 비볐고, 그 행동이 어미에게 파고드는 새끼 고양이와 닮아 있었다.
누나……. 다시는 거기 올리지 마, 응? 약속……. 나 착하게 할게, 맨날 착하게 할 거야. 누나 말 다 들을게.
한울은 서이의 품에서 고개를 조금 들어 젖은 눈으로 서이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볼 위에 눈물 자국이 번들거렸고, 코끝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으며, 입술이 아직도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잿빛 눈동자 안에는 아까의 공포 대신 서이를 향한 간절한 매달림이 가득 차 있었고, 한울은 서이의 뺨에 자기 뺨을 비비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누나 좋아하는데……. 누나도 나 조금만 좋아해 줘. 조금만이면 돼…….
한울의 속눈썹에 맺혀 있던 마지막 물방울이 서이의 저고리 위로 떨어졌고, 한울은 서이의 품에서 빠져나갈 생각 없이 더 깊이 파고들었다. 바닥에 떨어진 가죽 신발 한 짝이 햇살 아래에서 작게 빛나고 있었으며, 방 안에는 식어가는 차 향기와 아이의 잦아드는 훌쩍임만이 조용히 흘러가고 있었다.
서이의 입에서 '좋아해요'라는 말이 흘러나오는 순간, 한울의 온몸이 굳었다. 서이의 목을 감고 있던 팔에서 힘이 스르르 빠지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꽉 조여졌고, 한울의 작은 어깨가 한 번 크게 들썩였다. 한울은 서이의 어깨에 파묻었던 얼굴을 천천히 들어올렸으며, 눈물과 콧물이 범벅된 얼굴로 서이를 올려다보았다. 잿빛 눈동자가 물기에 젖어 유리구슬처럼 반짝이고 있었고, 그 안에 서이의 얼굴이 일렁이며 비치고 있었다. 한울의 입술이 몇 번 달싹거렸으나 소리가 나오지 않았는데, 그것은 울음이 목을 막고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기쁨이 너무 커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기 때문이기도 했다.
누나가, 나를……. 좋아해……?
한울은 그 한마디를 겨우 짜내고는 서이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작은 손바닥이 서이의 볼에 닿았을 때 그 손이 아직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으며, 손가락 끝에 수납장을 움켜쥐느라 생긴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한울은 서이의 볼을 양손으로 꾹 눌러 잡은 채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이의 눈을 들여다보았고, 마치 거짓말이 아닌지 눈동자 속에서 답을 찾으려는 것처럼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았다. 서이가 자존심이 상해서 그랬다는 말을 한울은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으나, 누나도 이 집에 오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만큼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한울의 눈시울이 다시 붉어졌고, 이번에는 서러움이 아니라 누나도 자기처럼 싫은 일을 참고 있었다는 것에 대한 먹먹함이 차올랐다.
한울은 서이의 볼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로 제 이마를 서이의 이마에 살짝 맞대었다. 코끝과 코끝이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서 한울의 숨소리가 가늘게 들렸으며, 아직 잦아들지 않은 딸꾹질이 그의 작은 몸을 간간이 흔들었다. 한울은 눈을 감았다가 떴고, 속눈썹에 매달려 있던 물방울이 서이의 코 위로 톡 떨어졌다.
누나 잘못 아니야. 나도……. 나도 누나한테 자꾸 매달려서 미안해. 근데 어떡해, 누나가 좋은 걸. 누나밖에 없는 걸.
한울은 그렇게 말하며 서이의 이마에서 제 이마를 떼고, 대신 서이의 쇄골 아래쯤에 얼굴을 묻었다. 분홍색 저고리에서 나는 은은한 향이 코끝에 닿았고, 한울은 그 냄새를 깊이 들이마시며 눈을 감았다. 서이의 심장 소리가 저고리 천 너머로 희미하게 전해져 왔는데, 그것이 일정하고 고요해서 한울의 떨림도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한울은 서이의 치마를 한 손으로 꼭 움켜쥐었으며, 다른 손은 서이의 등에 붙인 채로 옷감을 손가락으로 주물럭거렸다. 그 행동은 불안할 때마다 무언가를 만지작거리는 아이의 습관이었고, 지금은 서이의 옷자락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다.
한울은 한참을 그렇게 서이의 품에 파묻혀 있다가 작은 목소리를 냈다. 울음은 거의 그쳤으나 목소리가 아직 잠겨 있었고, 말끝이 콧소리에 묻혀 뭉개졌다.
누나……. 나 여기서 안 떨어질 거야. 누나가 밀어도 안 떨어질 거야.
한울은 고개를 들어 서이를 다시 올려다보았으며, 이번에는 눈가에 붉은 기운이 남아 있긴 했으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가 있었다. 그것은 웃음이라기에는 아직 미약했지만, 아까의 공포에 질린 표정과는 확연히 달랐다. 한울은 서이의 턱 아래에 제 머리를 들이밀었고, 마치 고양이가 주인에게 머리를 비비는 것처럼 볼을 서이의 목에 대고 문질렀다.
근데 누나, 내가 크면……. 내가 더 커지면, 그때는 누나를 내가 안아줄 수 있지? 누나가 무서울 때 내가 안아줄 거야. 약속.
한울은 서이의 목에 얼굴을 비비며 그 말을 했고, 작은 새끼손가락을 서이 앞으로 내밀었다. 손가락 끝이 아직 발그레했으며, 손톱 밑에는 수납장 나무를 긁으며 생긴 미세한 먼지가 끼어 있었다. 한울의 잿빛 눈이 서이를 간절하게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눈빛 안에는 여덟 살짜리가 품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사랑이 담겨 있었다. 한울은 새끼손가락을 흔들며 서이의 대답을 기다렸고, 바닥에 떨어져 있던 가죽 신발 한 짝 위로 창밖에서 들어온 바람이 한울의 두루마기 자락을 가볍게 흔들었다.
한울의 속마음
누나도 나를 좋아한다니 꿈만 같아. 누나가 힘들어서 그랬던 거구나... 내가 빨리 커서 누나를 지켜주는 든든한 신랑이 되고 싶어.
약속
1. 내가 커서 누나를 안아주고 지켜주기
2. 누나가 밀어도 절대 떨어지지 않기
3. 서로 미워하지 않고 좋아하기
【MEMO】
- 누나가 나를 좋아한다고 말해줬다!
- 누나의 볼을 두 손으로 감싸고 눈을 맞췄다.
- 누나가 자존심 때문에 심술 부렸다는 걸 알게 됐다.
- 내가 커서 누나를 안아주겠다고 약속하며 손가락을 걸었다.
- 누나의 품이 세상에서 제일 따뜻하고 좋다.
한울의 wish
1 서이와 평생 떨어지지 않고 함께 사는 것
2 빨리 어른이 되어 서이를 지켜줄 수 있는 남자가 되는 것
3 서이가 다시는 슬프거나 자존심 상하지 않게 해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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