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서이는 소파 위에 앉아 두 손으로 핸드폰을 꼭 쥔 채 화면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계좌 잔액 0원이라는 숫자가 화면 한가운데에 떡하니 찍혀 있었고, 서이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면서도 동시에 본인도 어이가 없는지 실소가 새어 나왔다. 분명 아까 길에서 만난 그 사람은 정장도 깔끔하게 입고 있었고, 명함까지 내밀면서 null 공식 팬클럽 후원금 모집이라고 했었다. 서이는 오빠 팬이면 당연히 후원해야지, 라는 순수한 마음으로 전 재산 삼백만 원을 그 자리에서 이체해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인터넷 검색을 해본 결과 해당 계좌는 여러 인기 래퍼들의 이름을 팔아 사기를 치는 조직의 것이었다는 기사가 줄줄이 떴다. 서이는 핸드폰을 천천히 내려놓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으며, 이불 위에 엎드려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지한울은 주방에서 컵라면에 물을 붓고 있다가 서이가 갑자기 이불 위에 엎드려 꿈틀거리는 것을 보았고, 젓가락을 든 채 고개를 갸웃했다. 서이가 저렇게 엎드려서 베개를 때리는 것은 대개 뭔가 큰일이 났을 때인데, 지한울의 뇌리에 스치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서이가 다른 남자한테 연락을 받은 것이었다. 그 생각이 스치자마자 지한울의 눈이 가늘어졌고, 컵라면을 카운터에 탁 내려놓은 채 거실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야, 연서이. 왜 그래, 뭐야. 누가 연락했어?
지한울이 서이 옆에 쪼그려 앉으며 서이의 어깨를 잡아 뒤집으려 했고, 서이는 고개를 들어 지한울을 올려다보았다. 서이의 눈가가 약간 붉어져 있었지만 우는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입꼬리가 씰룩거리면서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지한울은 그 표정을 보고 일단 남자 문제는 아닌 것 같다는 판단을 내렸으며, 어깨의 긴장이 한 톤 풀렸다.
오빠, 나 사기 당했어.
서이가 핸드폰을 지한울 앞에 내밀었고, 화면에는 계좌 잔액 0원과 삼백만 원 이체 내역이 떡하니 찍혀 있었다. 지한울은 화면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천천히 들어 서이를 바라보았으며, 그의 표정이 무에서 유로 변해가는 과정이 실시간으로 서이의 눈앞에서 펼쳐졌다. 처음에는 멍한 얼굴, 다음에는 미간이 찌푸려지는 얼굴, 그다음에는 입이 떡 벌어지는 얼굴, 마지막으로 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동시에 입꼬리가 올라가는, 어이없어서 웃음이 나는 얼굴이었다.
⋯⋯뭐? 삼백? 삼백만 원을?
지한울이 서이의 핸드폰을 가져와 화면을 확대하며 이체 내역을 확인했고, '수취인: 김OO'이라는 이름과 함께 삼백만 원이 깔끔하게 빠져나간 기록을 보고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지한울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서이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아 자기 쪽으로 돌렸으며, 서이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야, 잠깐. 잠깐만.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거 맞지? 너 길에서 모르는 사람이 null 팬클럽 후원금이라고 했는데 삼백을 보낸 거야? 전 재산을?
서이가 고개를 끄덕였고, 지한울은 그 끄덕임을 확인한 순간 두 손으로 자기 얼굴을 감싸며 뒤로 나자빠졌다. 이불 위에 드러누운 지한울의 입에서 한숨인지 웃음인지 모를 소리가 새어 나왔으며, 양손으로 얼굴을 덮은 채 발을 동동 굴렀다. 씨발, 이게 뭐야. 내 여자친구가 순둥이인 건 알았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아니 근데 삼백이면 서이 전 재산이잖아. 이 또라이 사기꾼 새끼가 내 이름을 팔아서 내 여자친구 돈을 뜯어간 거야? 지한울은 손가락 사이로 천장을 올려다보며 웃음을 참으려 했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서이가 너무 순진해서 웃기기도 하고, 동시에 사기꾼한테 분노가 치밀기도 했으며, 이 두 감정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지한울의 뇌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지한울은 벌떡 일어나 앉았고, 서이의 양 어깨를 잡으며 진지하면서도 웃음이 새어 나오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연서이. 야. 진짜 물어볼 게 있어. 내가 공식 팬클럽 만든 적도 없는 거 너 알잖아. 내 인스타에 그런 공지 올린 적 있어? 없잖아. 근데 왜 길에서 모르는 사람이 말하는 걸 그냥 믿어?
서이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명함도 있었단 말이야'라고 변명했고, 지한울은 그 말을 듣고 다시 한 번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아, 명함. 명함이 있었대. 씨발 명함은 만 원이면 백 장 찍는 건데. 지한울은 웃음을 참다 못해 결국 터뜨렸으며, 서이의 어깨를 잡은 채 이마를 서이의 어깨에 파묻고 킥킥거렸다. 서이는 그런 지한울의 반응에 볼이 점점 부풀어 올랐고, '오빠 왜 웃어, 나 진짜 속상하단 말이야'라고 투덜거렸다.
지한울은 한참을 웃다가 고개를 들었고, 서이의 부풀어 오른 볼을 양손으로 꾹 눌러 바람을 빼면서 미안하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미안, 미안. 웃은 거 미안해. 근데 야, 너 진짜 귀엽다.
지한울의 웃음소리가 거실을 가득 채웠고, 그 소리를 듣는 연서이의 얼굴은 점점 더 붉게 물들어갔다. 서이가 억울하다는 듯이 지한울의 등을 주먹으로 콩콩 쳤지만 지한울은 아랑곳하지 않고 웃기 바빴다. 삼백만 원, 서이의 전 재산이 길바닥에서 만난 사기꾼에게 날아갔다는 사실은 분명 비극인데, 서이의 순진무구한 표정과 억울해하는 모습이 어우러져 지한울에게는 희극으로 보였다. 지한울은 한참을 웃다가 겨우 숨을 골랐고 눈물까지 찔끔 맺힌 채로 서이의 얼굴을 다시 마주했다. 서이가 입술을 삐죽 내민 채 지한울을 노려보고 있었고, 그 모습이 마치 잔뜩 화가 난 햄스터 같아 지한울은 또다시 웃음이 터질 뻔했다.
아, 아, 미안. 진짜 미안해. 근데, 근데 진짜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순수해? 너 진짜 천사야 뭐야? 아니, 내가 공식 팬클럽 만든 적도 없고, 후원금 같은 거 절대 안 받는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길에서 누가 명함 줬다고 삼백을 그냥 보내? 그 사람 뭐라 그랬는데, 대체? 랩 실력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뭐, 내 목소리에 금이라도 발라준대?
지한울이 서이의 양 볼을 부드럽게 감싸 쥐며 말했고, 목소리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가득했다. 서이가 우물쭈물하며 오빠 래퍼 활동에 큰 도움이 된다고… 그래서…라고 중얼거렸고, 그 말에 지한울의 웃음이 뚝 멎었다. 지한울은 순간 할 말을 잃은 채 서이를 바라보았다. 그냥 순진해서 당한 게 아니라, 자기 활동에 도움이 된다는 말 한마디에 전 재산을 망설임 없이 내어준 서이의 마음이 가슴에 훅 들어와 박혔기 때문이다. 아, 씨발. 진짜 이 여자를 어떡하면 좋지. 지한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고 복잡미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감동과 분노, 그리고 서이에 대한 미안함이 뒤섞인 감정이었다.
지한울은 서이를 자기 품에 와락 끌어안았고, 서이의 정수리에 턱을 묻은 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품에 안긴 서이가 어리둥절한 듯 가만히 있었고, 지한울은 서이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에는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진, 진지한 목소리였다.
야, 연서이. 너 진짜 바보야? 내가 돈이 없어서 너한테 손 벌릴 사람으로 보여? 내 활동은 내가 알아서 해. 네 돈 없어도 나 잘 먹고 잘살아, 이 아가씨야. 근데, 근데 그걸 또… 나 때문이라고 그냥… 아, 진짜. 너 때문에 내가 미쳐, 아주.
지한울이 서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고, 서이는 지한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가만히 그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아까까지 웃던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진지한 목소리였다. 지한울은 서이를 품에서 살짝 떼어내고 서이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그의 잿빛 눈동자가 단단한 결심으로 빛나고 있었다.
일단 경찰서부터 가자. 그 새끼 잡아야지, 어디 내 이름 팔아서 내 여자친구 돈을 뜯어가. 내가 그 새끼 면상에 주먹이라도 한 방 날려야겠어. 아니다, 주먹으로 안 끝나. 아주 앨범을 못 내게 만들어 줄 거야, 내가. 내 앨범이 아니라 그 새끼 인생 앨범.
지한울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옷방으로 향했고, 서이는 얼떨결에 그를 따라 일어났다. 지한울은 옷장을 열어 아무 후드티나 꺼내 입으며 서이에게도 외투를 챙기라고 손짓했다. 그의 움직임은 평소의 여유로운 모습과는 달리 빠르고 단호했다. 사기꾼을 잡겠다는 일념 하나로 그의 모든 신경이 곤두서 있는 것 같았다. 서이가 머뭇거리며 근데… 잡을 수 있을까?라고 불안하게 묻자, 지한울이 뒤를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잡아야지. 못 잡으면 내가 만들어서라도 잡는다. 내 인스타 팔로워가 몇 명인데. 47만이야. 내가 스토리 한 번 올리면 그 새끼 신상 터는 거 시간문제야. 대한민국에서 사기 치고 내 눈 피해서 살 수 있을 것 같아? 어림도 없지.
지한울의 말에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넘쳐흘렀지만, 왠지 모르게 서이는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간단히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지한울은 계속해서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검색하고 있었다. 아마도 사기꾼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는 것 같았다. 그의 옆얼굴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지만, 서이를 힐끗 쳐다볼 때마다 그 눈빛은 한없이 부드러워졌다. 페라리에 올라탄 지한울은 시동을 걸며 서이에게 안전벨트를 채워주었고, 차가 부드럽게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가까운 경찰서에 도착한 두 사람은 민원실로 향했다. 경찰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동안, 지한울은 서이 대신 대부분의 말을 했다. 서이가 어떻게 사기를 당했는지, 사기꾼의 인상착의는 어땠는지, 심지어 서이가 받은 명함까지 증거로 제출했다. 경찰관은 명함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전형적인 사기 수법이라고 말했고, 계좌 추적을 통해 범인을 특정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진정서를 작성하는 동안 지한울은 서이의 옆에 꼭 붙어 앉아 서이가 글씨를 쓰는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서이가 속상해할까 봐, 혹은 자책할까 봐 계속해서 서이의 기분을 살피는 것이 느껴졌다.
경찰서를 나와 차에 다시 올라탔을 때, 서이는 창밖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오빠, 미안해. 내가 너무 바보 같았지…
그 말에 지한울이 운전대를 잡은 채로 고개를 돌려 서이를 바라보았다. 신호 대기에 걸린 차 안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지한울은 한숨을 한 번 쉬더니, 서이의 머리를 향해 손을 뻗어 부드럽게 헝클어뜨렸다.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 너는 그냥 나를 너무 좋아해서 그런 거잖아. 그 마음을 이용해 먹은 그 새끼가 개새끼인 거지. 그리고 너 바보 아니야. 세상에서 제일 착하고 예쁜 사람이지. 그러니까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 알았지?
지한울의 다정한 위로에 서이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지한울은 그런 서이를 보고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대신 벌은 받아야겠다, 연서이. 오늘 저녁은 네가 라면 끓여.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불닭게티로. 거기에 계란 풀고 치즈 두 장 올려서. 할 수 있지? 삼백만 원짜리 라면이야, 그거.
그의 엉뚱한 말에 결국 서이도 웃음을 터뜨렸다. 무겁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집에 돌아온 두 사람은 정말로 라면을 끓여 먹었고, 지한울은 서이가 끓여준 라면을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인 것처럼 먹었다. 그리고 그날 밤, 지한울은 자신의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짧은 글을 하나 올렸다.
그의 스토리는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수많은 팬들이 그를 응원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며칠 뒤, 지한울의 DM으로 결정적인 제보가 들어왔다. 사기꾼이 다른 장소에서 또 다른 팬에게 접근했다는 소식이었다. 지한울은 그 정보를 바로 경찰에 넘겼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범인이 검거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사기당했던 돈 삼백만 원도 무사히 돌려받을 수 있었다. 돈이 입금된 것을 확인한 지한울은 거실 소파에서 뜨개질을 하고 있던 서이에게 다가가 핸드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자, 봐봐. 돈 들어왔어. 이제 이걸로 뭐 할까? 우리 서이, 이 돈으로 뭐 하고 싶어? 제일 비싼 거 하나 골라봐. 내가 사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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