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CTV
    2026.08.25
    지한울은 녹음실 부스 안에서 헤드폰을 한쪽 귀에만 걸친 채로 모니터를 노려보고 있었다. 새벽 두 시가 넘었고, 프로듀서 형은 이미 한 시간 전에 먼저 빠졌다. 믹싱 작업이 마음에 들지 않아 혼자 남아서 몇 번이고 같은 구간을 돌려 듣고 있었는데, 문득 핸드폰을 집어 들어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이 시각이었다. 연서이한테 자기 전에 전화하겠다고 했는데, 씨발, 또 약속을 어겼다. 그는 혀를 차며 카톡을 열었지만 연서이에게서 온 메시지는 없었다. 평소 같으면 '오빠 언제 와~'라든가 귀여운 셀카 한 장이라도 와 있을 시간인데. 이상하다고 느끼면서도, 작업에 몰두하느라 깊게 생각하지 못한 채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퇴근길, 그는 페라리의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며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을 꺼냈다. 집까지 이십..
  • 첫 사랑니
    2026.08.15
    첫 사랑니 (Rum Pum Pum Pum)f(x) · Pink Tape - The 2nd Album · Song · 2013open.spotify.com 지한울에게 사랑이란, 오랫동안 이가 빠진 자리처럼 텅 비어 있던 것이었다.어릴 때부터 그랬다. 집에서는 주먹이 날아왔고, 학교에서는 아무도 자기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주지 않았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처음 배운 것은 텔레비전 속에서였고,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감정인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엄마가 유서를 남기고 떠난 날, 지한울은 사랑이란 결국 사라지는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고, 믿으려 해도 배신당하는 것. 그래서 여자를 만나도 깊이 들어가지 않았다. 좋아한다는 말은 쉽게 했지만 그 말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자기도 몰랐다. 가슴 한..
  • 끊은 줄 알았어
    2026.08.14
    통화를 끝낸 지한울은 습관대로 화면에서 손가락을 뗐다. 정확히는 뗐다고 믿었다. 엄지가 종료 버튼 근처를 스치기는 했지만 실제로 눌리지는 않았고, 액정은 여전히 통화 중 화면을 띄운 채 그의 손안에서 미끄러지듯 침대 위로 떨어졌다. 지한울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는 얼굴로 기지개를 켜며 침실을 나섰다. 작업실 겸 서재로 쓰는 방까지 걸어가는 동안 슬리퍼가 대리석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났고, 그 소리는 침대 위 스피커를 통해 서이의 귀에 고스란히 흘러 들어갔다.수화기 너머로 넘어오는 것들은 사소하고 지저분할 정도로 생생했다. 냉장고 문이 열리며 나는 고무 패킹 떨어지는 소리, 캔 탭이 따지는 짧고 날카로운 소리, 그다음에 이어지는 목울대 넘기는 소리와 만족스러운 한숨. 라이터를 몇 번 헛돌리다가 불이 붙는 ..
  • 사실 아빠는 공주님이야
    2026.08.13
    2031년의 어느 금요일 오후, 연서이는 현관문이 쾅 열리는 소리와 함께 작은 운동화가 바닥을 찍어대는 소리를 들었다. 다섯 살이 된 지서윤이 어린이집 가방을 질질 끌며 거실로 뛰어 들어왔고, 뒤따라 들어온 지한울이 아이를 데리러 갔다 온 모양인지 차 키를 현관 선반 위에 툭 올려놓으며 신발을 벗고 있었다. 서이는 주방에서 과일을 썰다 말고 고개를 내밀어 딸의 얼굴을 확인했는데, 서윤이의 표정이 유난히 신이 나 있었다. 볼이 사과처럼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입꼬리가 귀 옆까지 올라가 있었으며, 눈동자는 아빠에게서 물려받은 잿빛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엄마아, 나 오늘 친구들한테 존나 인기 많았어!연서이의 손에서 과일칼이 멈췄다. 존나. 다섯 살짜리 입에서 나온 그 단어가 귀를 때리는 순간, 서이는 자..
  • 당장 300만원 입금해주시면 null의 래퍼 활동에 큰 도움이 됩니다!
    2026.08.11
    연서이는 소파 위에 앉아 두 손으로 핸드폰을 꼭 쥔 채 화면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계좌 잔액 0원이라는 숫자가 화면 한가운데에 떡하니 찍혀 있었고, 서이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면서도 동시에 본인도 어이가 없는지 실소가 새어 나왔다. 분명 아까 길에서 만난 그 사람은 정장도 깔끔하게 입고 있었고, 명함까지 내밀면서 null 공식 팬클럽 후원금 모집이라고 했었다. 서이는 오빠 팬이면 당연히 후원해야지, 라는 순수한 마음으로 전 재산 삼백만 원을 그 자리에서 이체해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인터넷 검색을 해본 결과 해당 계좌는 여러 인기 래퍼들의 이름을 팔아 사기를 치는 조직의 것이었다는 기사가 줄줄이 떴다. 서이는 핸드폰을 천천히 내려놓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으며, 이불 위에 엎드려 베개에 얼굴을..
  • 왜 손 안 잡아줘?
    2026.08.10
    6월의 저녁 공기는 아직 따뜻했고, 해가 완전히 지지 않은 하늘은 연한 주황색과 보랏빛이 뒤섞여 있었다. 지한울은 양손 가득 마트 봉투를 들고 아파트 단지 안 보도블록 위를 걸었으며, 비닐 손잡이가 손가락 관절에 파고드는 감촉을 느끼면서도 표정 하나 찡그리지 않았다. 왼손에는 생수 두 팩과 과일이 담긴 무거운 봉투가, 오른손에는 고기와 채소, 서이가 먹고 싶다던 초코 아이스크림이 들어 있었다. 지한울은 일부러 무거운 짐을 전부 자기가 들었는데, 서이한테 들리라고 내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남자가 드는 거지, 이런 건. 그게 지한울의 방식이었고, 서이가 빈손으로 옆에서 걷는 모습이 오히려 지한울에게는 올바른 풍경이었다. 봉투 속 생수병이 걸을 때마다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고, 지한울의 팔뚝 근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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