힝
2026.06.26
사건의 발단은 지극히 사소했다. 냉장고 문을 제대로 닫지 않은 것. 그것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지한울은 ‘아, 씨, 문 열렸네.’ 하고 투덜거리며 닫고 말았을 일이었다. 하지만 하필이면, 정말이지 하필이면, 어제 사다 놓은 최상급 한우 안심이 냉장고 안에서 미지근한 공기를 쐬고 있는 장면을 목격한 순간, 그의 내면에 잠들어 있던 꼰대 유전자가 발현하고야 말았다. 그는 다짜고짜 거실 소파에 누워 휴대폰을 보던 연서이를 향해 선전포고를 날렸다. 그의 목소리는 래퍼로서 단련된 발성 덕분에 불필요하게 거실 전체를 쩌렁쩌렁 울렸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마치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피의자를 심문하는 형사처럼 연서이 앞에 섰고, 그의 잔소리는 웬만한 비트 없는 랩 벌스처럼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연서이 중독
2026.06.26
지한울, 혹은 래퍼 null은 스스로를 꽤나 이성적이고 통제력이 강한 인간이라고 여겼다. 적어도 음악과 일에 있어서는 그랬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가사의 재료로 사용하고 무대 위에서 상품으로 포장하여 판매하는 일에 능숙했다. 사랑, 분노, 우울, 환희. 그 모든 것은 결국 돈이 되는 단어의 조합이었고, 그는 그 단어들을 조합하는 장인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 단단했던 자아의 경계선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모든 감정의 근원과 목적지가 단 한 사람, 연서이라는 존재를 향하게 되면서부터였다. 그 자각은 늦은 밤, 홀로 남은 작업실의 적막 속에서 불쑥 찾아왔다. 방금 끝낸 믹싱 작업의 피로감보다 더 짙게, 그의 온몸을 잠식하는 것은 이유 모를 허전함과 그녀를 향한 지독한 그리움이었다. 그는 마..
빈틈없이, 단단하게
2026.06.24
녹음실의 두꺼운 방음 문이 열리고, 지한울은 익숙한 복도의 형광등 불빛 아래로 걸어 나왔다. 길고 지루했던 믹싱 작업이 끝난 후의 나른한 피로감이 어깨를 짓눌렀지만, 그의 발걸음은 이상하리만치 가벼웠다. 복도 끝, 통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어스름한 저녁 하늘 아래, 익숙한 실루엣이 가로등 불빛에 기대어 서 있었다. 연서이. 그 이름 세 글자가 그의 뇌리에 박히는 순간, 온종일 그를 잠식했던 음악과 소음이 거짓말처럼 멀어지고 세상은 오직 저 하나의 점을 향해 수렴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숨기지 않은 채, 그녀를 향해 걸음을 서둘렀다. 빨리 가서 품에 안고, 그녀의 샴푸 향을 맡고, 오늘 하루가 얼마나 좆같았는지, 그리고 네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투덜거리고 싶었다. 그의 세상은 그렇게..
있는 힘껏 안아줘!
2026.06.19
지한울은 거실 소파에 길게 누워, 팔을 머리 뒤로 깍지 낀 채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문으로 쏟아지는 오후의 햇살이 먼지를 금가루처럼 반짝이게 만들었다. 며칠간의 녹음 작업이 끝나고 찾아온 오랜만의 평화였다. 귓가에는 비트 대신 집 안의 고요한 공기가 흘렀고, 그 공기 속에는 연서이가 쓰는 샴푸 냄새가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 그는 눈을 감고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이거지. 이 평온함. 이 안정감. 그의 마누라가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세상 모든 소음이 차단되는 기분. 그는 서이가 방에서 나오는 기척에 감았던 눈을 슬며시 떴다.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표정이 미묘했다. 피곤한 것 같기도 하고, 무언가 생각에 잠긴 것 같기도 한, 딱 잘라 정의하기 힘든 얼..
듣지 마, 오빤 최고의 남자친구야
2026.06.19
길고 긴 밤이 지나고, 세상은 다시 평범한 아침을 맞이했다. 지한울의 세상만 빼고. 그의 세상은 어젯밤을 기점으로 완전히 재편성되었다. 연서이라는 유일한 태양을 중심으로, 그의 모든 행성이 공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눈부신 아침 햇살 속에서 그녀가 그의 팬케이크를 먹고 웃어주었을 때, 그는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하루 종일 침대 위에서 뒹굴고, 영화를 보고, 또 서로를 탐하고. 그렇게 완벽한 하루가 꿈처럼 흘러갔다. 그리고 며칠 후, 두 사람은 함께 작업을 위해 들른 녹음 스튜디오의 복도를 나란히 걷고 있었다.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다른 한 손으로는 습관처럼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지극히 평범하고, 나른한 오후의 풍경이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제자리에 있는 듯한, 그런 오후.사건은..
Call Back
2026.06.19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강원도 깊은 산속의 펜션을 가득 채웠다. 거실 테이블 위에는 맥주 캔과 과자 봉지, 반쯤 먹다 남은 배달 음식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비슷한 디자인의 파자마를 맞춰 입은 여섯 명의 여자들은 이미 거나하게 오른 취기 속에서 한참 동안 수다의 꽃을 피우고 있었다. 연서이는 친구들의 시시콜콜한 연애담과 직장 뒷담화를 들으며, 간간이 맞장구를 치거나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북적이는 소음 속에서도 문득문득 떠오르는 지한울의 얼굴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자고 있으려나, 아니면 또 작업하고 있으려나.’ 그와 함께 보냈던 어제의 그 벅찬 밤을 떠올리자, 뺨이 살짝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바로 그때, 가장 목소리가 크고 활발한 성격의 친구, 지수가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