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긴 밤이 지나고, 세상은 다시 평범한 아침을 맞이했다. 지한울의 세상만 빼고. 그의 세상은 어젯밤을 기점으로 완전히 재편성되었다. 연서이라는 유일한 태양을 중심으로, 그의 모든 행성이 공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눈부신 아침 햇살 속에서 그녀가 그의 팬케이크를 먹고 웃어주었을 때, 그는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하루 종일 침대 위에서 뒹굴고, 영화를 보고, 또 서로를 탐하고. 그렇게 완벽한 하루가 꿈처럼 흘러갔다. 그리고 며칠 후, 두 사람은 함께 작업을 위해 들른 녹음 스튜디오의 복도를 나란히 걷고 있었다.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다른 한 손으로는 습관처럼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지극히 평범하고, 나른한 오후의 풍경이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제자리에 있는 듯한, 그런 오후.
사건은 언제나 가장 평화로운 순간에, 불쑥 고개를 드는 법이다. 복도 모퉁이를 돌자, 익숙한 얼굴 몇몇이 휴게 공간 소파에 모여 앉아 킬킬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최근에 함께 작업했던 프로듀서와, 신인 래퍼 두어 명이었다. 그들은 무언가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듯, 과장된 몸짓까지 섞어가며 열을 올리고 있었다. 지한울은 별 관심 없다는 듯, 연서이를 데리고 그냥 지나치려 했다. 어차피 저 나이대 애들이 하는 얘기란 뻔했다. 여자, 돈, 아니면 다른 래퍼 뒷담화. 그에게는 연서이의 머리카락 한 올을 감상하는 것보다도 못한, 무가치한 소음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발걸음이 느려진 것은, 순전히 우연히 귓가에 날아와 박힌 몇 개의 단어 때문이었다.
아니 그래서 최악의 이상형이 뭐냐고. 나는 일단… 씨발, 무슨 자기 인생에 여자가 전부인 것처럼 구는 새끼. 존나 부담스러워. 무슨 내가 지 엄마야? 인정. 그리고 폰 검사하려는 새끼. 진짜 정떨어짐. 가사에는 맨날 사랑, 사랑, 이지랄하는데 현실은 의처증 말기일 것 같은 놈 있잖아. 얼굴만 반반하고 속은 썩어 문드러진… 와, 상상만 해도 토 나온다. 그들의 대화는 명백히 특정인을 겨냥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이런 남자는 최악이다’라는 주제로 떠드는, 흔해빠진 잡담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들이 묘사하는 ‘최악의 남자’는 이상할 정도로 지한울과 닮아있었다. 인생에 여자가 전부고, 폰 검사에 집착하고, 가사는 사랑 노래 투성이지만 속은 불안으로 가득 찬 남자. 이건 뭐, 거의 자기소개 수준이었다. 지한울은 순간적으로 표정이 굳었다. 씨발, 저 새끼들이 나 보라고 하는 소린가. 아니, 그럴 리 없지. 그는 애써 태연한 척, 다시 걸음을 옮기려 했다. 어차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 그만이다. 저런 애송이들의 평가에 흔들릴 지한울이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연서이의 어깨를 감싼 팔에 힘을 주어 앞으로 나아가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의 옆에 나란히 걷던 연서이가 갑자기 우뚝,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어?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그의 앞에 마주 서서 그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는 까치발을 들어 그의 양쪽 귀를 자신의 작고 부드러운 손으로 완전히 틀어막았다. 따뜻하고 보드라운 감촉이 귀를 감싸는 순간, 지한울의 사고 회로는 정지했다. 세상의 모든 소음이 거짓말처럼 차단되었다. 웅웅거리는 자신의 혈류 소리와, 눈앞에서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만이 세상의 전부가 되었다. 그녀의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무언가 중요한 의식을 치르는 사람처럼, 비장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고요함 속에서,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듣지 마, 오빠. 오빤 최고의 남자친구야.
그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지한울은 그녀의 입 모양을 정확히 읽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펑’ 하고 터져나가는 소리가 났다. 방금 전까지 그의 내면을 좀먹던 불쾌감, 모욕감, 그리고 ‘씨발, 내가 진짜 저런 새끼인가?’ 하는 자기혐오의 싹이, 그녀의 그 한마디에 의해 원자 단위로 분해되어 사라져버렸다. 그는 거대한 충격에 휩싸여 그저 눈만 끔뻑였다.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데, 동시에 눈물이 핑 돌 것 같기도 한, 생전 처음 느껴보는 기묘한 감정이었다. 저 꼬맹이들의 하찮은 잡담 따위에, 자신의 유일한 세계가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나서서 방어막을 쳐준 것이다. 그 어떤 팬들의 열광적인 찬사보다, 그 어떤 평론가들의 극찬보다, 지금 이 순간 귀를 막고 자신을 지켜주는 이 작은 행동 하나가 그의 심장을 더욱 세게 뒤흔들었다.
지한울은 잠시 멍하니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이내 참지 못하고 푸하하, 하고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복도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폭소였다. 소파에 앉아 떠들던 래퍼 지망생들이 깜짝 놀라 이쪽을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알 바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귀를 막고 있는 연서이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내렸다. 그리고 그 손을 자신의 뺨으로 가져가, 손바닥에 얼굴을 부볐다. 아, 진짜. 미치겠다, 너 때문에. 그는 웃음을 멈추지 못한 채,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아 품에 가두었다. 그녀는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 품 안에서 작게 버둥거렸다.
야, 연서이. 너 진짜… 사람 환장하게 하는 뭐 있냐?
그는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아직 웃음기가 가득했다. 방금 전까지 그를 괴롭혔던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은 이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는, 이 사랑스러운 존재에 대한 벅찬 감동과, 주체할 수 없는 행복감만이 가득 차올랐다. 그는 그녀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마치 온 세상에 ‘이 여자가 내 여자다, 이것들아!’ 하고 외치는 듯한 몸짓이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아까 그 무리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지한울은 그들을 향해 씨익, 하고 웃어 보였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가장 재수 없는 승리자의 미소였다. 그리고 그는 보란 듯이, 품에 안은 연서이의 입술에 깊고 진하게 키스했다. 주변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지금 이 순간, 그의 우주에는 오직 연서이, 그녀 하나뿐이었으니까. 키스가 끝나고, 그는 그녀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댄 채 나직하게 말했다.
최고의 남자친구한테, 오늘 집에 가서 상 줘야겠다. 각오해라, 너.
그의 말에 연서이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보며, 그는 다시 한번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아까보다 훨씬 더 당당하고 위풍당당한 걸음으로 복도를 걸어 나갔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그 어떤 소리도, 이제 더 이상 그의 마음에 상처를 낼 수 없었다. 그의 곁에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방패이자, 가장 완벽한 치유제인 그녀가 있었으므로. 그날 밤, 지한울은 자신이 받은 감동의 크기만큼, 아주 길고 진하게 그녀에게 ‘상’을 주었다고 한다. 물론, 그 상을 받는 과정에서 더 힘들어했던 것이 누구였는지는 둘만의 비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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