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평화로운 오후. 힙합씬을 주름잡던 래퍼 ‘null’은 이제 ‘지하늘 아빠’라는 새로운 타이틀로 더 유명했다. 그의 인스타그램은 온통 딸의 사진으로 도배되어 있었고, ‘fuckboy’를 외치던 그의 입에서는 이제 ‘우리 공주님, 맘마 먹을까?’ 같은 간드러진 소리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지한울, 그는 대한민국 연예계가 공인하고 팬들이 두 손 두 발 다 든 공식 딸바보였다. 그는 자신과 다섯 살 난 딸 지하늘 사이에는 그 어떤 비밀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굳게 믿었다. 하늘이가 오늘 유치원에서 무슨 색 크레파스를 썼는지, 점심으로 나온 깍두기를 몇 조각 남겼는지까지 전부 꿰고 있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아빠라고 자부했다.
사건의 발단은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거실 소파에 드러누워 여유롭게 휴대폰을 보던 그는, 주방에서 들려오는 아내 연서이와 딸 하늘이의 소곤거림에 무심코 귀를 기울였다. 평소라면 ‘우리 공주님이랑 마누라님이 무슨 비밀 얘기를 하시나~’하며 능글맞게 끼어들었겠지만, 그날따라 유독 두 사람의 목소리가 작고 은밀하게 느껴졌다.
“엄마, 근데… 이거 아빠한테는 말하면 안 돼.”
“응? 왜? 아빠 서운해하실 텐데.”
“아니야아, 아빠는 놀릴 거 같단 말이야. 엄마랑만 아는 비밀이야, 알았지?”
지한울의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뚝, 멎었다. ‘비밀’. 그 단어가 그의 뇌리에 번개처럼 내리꽂혔다. 나와의 사이엔 단 1의 비밀도 없다고 믿었던 딸이, 엄마와 단둘만의 비밀을 만들었다고? 그것도 나를, 아빠를 완벽하게 배제한 채로? 그는 귀를 의심했다. 아니, 이건 현실이 아닐 거야. 내가 헛것을 들은 게 분명해. 하지만 이어지는 서이의 나지막한 웃음소리는 그의 마지막 희망마저 가차 없이 짓밟아버렸다.
“알았어, 알았어. 엄마랑 하늘이만의 비밀. 그래서, 그 남자애 이름이 뭐라고?”
“으응… 민준이야. 김민준. 웃는 게 멋있어….”
김.민.준. 지한울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배신감, 서운함, 그리고 정체 모를 사내 ‘김민준’에 대한 맹렬한 분노가 그의 온몸을 휘감았다. 감히 어떤 놈이, 내 딸의 마음에, 그것도 나 몰래 들어와? 심지어 우리 하늘이가 먼저 좋아한다고? 그는 당장이라도 주방으로 달려가 하늘이를 품에 안고 ‘어떤 놈이야, 어떤 놈이 우리 공주님한테 꼬리를 쳐!’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간신히 이성을 붙잡았다. 그랬다간 ‘아빠는 놀릴 것 같다’던 딸의 예언을 완벽하게 실현하는 셈이 될 테니까. 그는 대신, 조용히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문을 닫자마자, 그는 처절하게 무너졌다.
“아아아… 죽고 싶어…. 내가, 내가 아빠인데…. 어떻게 나한테 말을 안 해….”
그는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한참을 절규했다. 한때 수만 관중을 열광시켰던 카리스마는 온데간데없고, 딸의 첫사랑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진 한낱 필부에 불과했다. 그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에 빠졌다. 이대로 모른 척해야 하는가? 아니면 대놓고 물어봐야 하는가? 하지만 섣불리 물었다간 ‘아빠 미워!’라는 최악의 사태를 맞이할 수도 있었다. 결국 그는, 래퍼로서 갈고닦은 모든 재능을 총동원하여 ‘김민준’이라는 놈의 정체를 파헤치기로 결심했다. 작전명: 잠입수사. 목표: 딸의 마음을 훔쳐 간 도둑놈 검거.
다음 날 아침, 지한울은 평소보다 훨씬 더 다정한 모습으로 하늘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었다. 그는 헤어지기 직전, 최대한 자연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하늘아, 오늘 유치원 가서 누구랑 제일 재밌게 놀 거야?”
“음… 지수랑! 소꿉놀이 할 거야!”
지한울의 미간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김민준’의 ‘김’자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다음 작전을 개시했다. 하원 시간에 맞춰 유치원 앞으로 찾아간 그는,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 틈에 섞여 아들 찾는 아빠인 척, 매서운 눈으로 타겟을 물색했다. 하지만 다섯 살 남자아이들은 전부 똑같이 생겼다. 다들 코를 훌쩍이고, 의미 없이 뛰어다니고, 가끔 서로를 밀칠 뿐이었다. 대체 어떤 놈이 ‘웃는 게 멋있는’ 김민준이란 말인가. 그의 눈에는 그저 콧물 묻은 얼굴로 실없이 웃는 애송이들로만 보였다.
결국 그는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했다. 그날 밤, 잠든 서이의 휴대폰을 몰래 집어 든 그는, 그녀와 유치원 학부모 단톡방을 샅샅이 뒤졌다. 그리고 마침내, ‘햇님반 김민준 엄마’라는 프로필을 찾아냈다. 그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프로필 사진을 눌렀다. 사진 속에는, 선하게 웃는 엄마 옆에, 똑같이 반달 눈으로 활짝 웃고 있는 남자아이가 있었다. 지한울은 그 웃는 얼굴을 보는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씨발. ……인정하기 싫지만, 좀 귀엽게 생겼잖아.
그날 이후, 지한울의 기묘한 견제는 계속되었다. 그는 하늘이의 가방에 자신이 직접 사인한 브로마이드를 넣어주며 “혹시라도 하늘이 괴롭히는 남자애 있으면, 아빠가 이런 사람이라고 보여줘”라고 말하는가 하면, 밸런타인데이에는 하늘이에게 ‘오직 아빠만 줄 수 있는 초콜릿’이라며 사람 얼굴만 한 초콜릿을 안겨주기도 했다. 그의 유치한 질투와 은밀한 견제를 아는지 모르는지, 하늘이는 그저 아빠의 사랑이 넘치는 아이로 무럭무럭 자라났다.
시간이 흘러, 하늘이의 유치원 졸업식 날. 지한울은 딸의 첫 사회생활 마무리를 축하하기 위해 최고급 정장을 차려입고 카메라를 든 채 참석했다. 졸업식이 끝나고, 그는 마침내 문제의 ‘김민준’과 그 어머니를 실제로 마주하게 되었다. 민준이 엄마는 서이에게 다가와 반갑게 인사를 건넸고, 지한울은 마지못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바로 그때였다.
“하늘아, 나 이거 너 주려고….”
김민준이 작은 손으로 꼬깃꼬깃한 편지와 사탕 하나를 하늘이에게 건넸다. 그 순간, 지한울의 눈이 불꽃처럼 타올랐다. 내 딸에게! 내 눈앞에서! 감히! 그가 나서서 막으려는 찰나, 하늘이는 편지를 받지도 않고 고개를 저었다.
“미안, 민준아. 난 이제 너 안 좋아해.”
“……어? 왜?”
“음… 우리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멋있거든! 난 아빠랑 결혼할 거야!”
하늘이는 그렇게 말하며, 지한울에게 달려와 와락 안겼다. 지한울은 어안이 벙벙한 채로 딸을 끌어안았다. 충격에 빠진 민준이와, 어쩔 줄 몰라 하는 민준이 엄마,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며 웃음을 참고 있는 서이를 배경으로, 지한울은 세상 전부를 얻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딸의 이마에 크게 뽀뽀를 하며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그래, 역시 우리 공주님은 뭘 안다니까. 김민준 따위가 감히 누굴 넘봐. 지한울의 완벽한 승리였다.
……물론, 일주일 뒤 하늘이가 초등학교 입학식에서 만난 ‘이도윤 오빠’가 너무 멋있다며 다시 엄마와 비밀 얘기를 시작하기 전까지의, 아주 짧고 눈부신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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