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음실의 두꺼운 방음 문이 열리고, 지한울은 익숙한 복도의 형광등 불빛 아래로 걸어 나왔다. 길고 지루했던 믹싱 작업이 끝난 후의 나른한 피로감이 어깨를 짓눌렀지만, 그의 발걸음은 이상하리만치 가벼웠다. 복도 끝, 통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어스름한 저녁 하늘 아래, 익숙한 실루엣이 가로등 불빛에 기대어 서 있었다. 연서이. 그 이름 세 글자가 그의 뇌리에 박히는 순간, 온종일 그를 잠식했던 음악과 소음이 거짓말처럼 멀어지고 세상은 오직 저 하나의 점을 향해 수렴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숨기지 않은 채, 그녀를 향해 걸음을 서둘렀다. 빨리 가서 품에 안고, 그녀의 샴푸 향을 맡고, 오늘 하루가 얼마나 좆같았는지, 그리고 네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투덜거리고 싶었다. 그의 세상은 그렇게 연서이를 향해 돌진하는 것으로 완성되곤 했다.

그러나 그의 세상이 그녀에게 닿기 불과 몇 미터 전, 예기치 않은 장애물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저기요, null 씨.’ 낯선 목소리였다. 팬인가. 지한울은 순간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평소라면 사인이라도 해주며 가볍게 응대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의 종착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고, 그 외의 모든 것은 성가신 방해물에 불과했다.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무심한 시선으로 목소리의 주인을 훑었다. 처음 보는 얼굴. 붉게 상기된 뺨과, 무언가 큰 결심을 한 듯 잘게 떨리는 입술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 씨발. 귀찮은 예감이 그의 등골을 스쳤다. 그는 마지못해 걸음을 멈추고 팔짱을 끼며 상대를 내려다보았다. 특유의 여유롭고 오만한 태도가 가면처럼 그의 얼굴에 씌워졌다.

‘잠깐만 시간 좀 내주세요.’ 여자의 목소리는 거의 울음에 가까웠다. 그녀는 두 손으로 작은 쇼핑백을 꼭 쥔 채, 그의 눈을 간절하게 올려다보았다. 주변을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흘끔거리기 시작했다. 지한울의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그는 턱짓으로 쇼핑백을 가리켰다. ‘선물은 회사 통해서 보내요. 직접은 안 받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건조했다. 팬 서비스용 미소 따위는 없었다. 그의 온 신경은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을 연서이에게 향해 있었다. 그녀가 이 불필요한 장면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짜증이 치밀었다. 그러나 여자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한 걸음 더 다가서며, 거의 애원하듯 말을 쏟아냈다. ‘선물이 아니에요. 제 마음이에요. 오래전부터, 정말 오래전부터 지켜봤어요. 당신의 음악이, 당신의 가사가, 당신의 모든 게 제 인생을 구원했어요. 그러니까 제발… 제 마음 한 번만….’

그 절절한 고백이 소음처럼 흩어지는 순간, 지한울의 머릿속에서는 이성의 퓨즈가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구원? 씨발, 구원이라는 단어를 어디서 함부로 입에 올려. 내 구원은 오직 한 사람, 연서이 뿐인데. 너 따위가 뭔데 내 서사에 숟가락을 얹으려 들어. 그의 속에서 들끓는 분노와 경멸이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그는 가까스로 그것을 억눌렀다. 연서이가 보고 있었다. 그는 분노를 표출하는 대신, 가장 차갑고 잔인한 방식을 택하기로 했다. 그는 팔짱을 푼 뒤, 여자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의 잿빛 눈동자에는 그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마치 길가의 돌멩이를 보는 듯한 무감각한 시선이었다. 주변의 시선이 더욱 노골적으로 달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수군거리는 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완벽한 무대였다. 한 명의 광대와, 그 광대를 경멸하는 주인,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지켜보는 관객들.

‘고마운데, 나는 당신 구원한 적 없어요.’ 그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내 음악이 당신한테 어떻게 들렸는지는 내 알 바 아니고, 앞으로도 알고 싶지 않네. 그리고 당신 마음? 그런 거, 나한테는 그냥 길에 널린 쓰레기 같은 거야. 함부로 던지지 마. 치우기 귀찮으니까.’ 그는 의도적으로 가장 모욕적인 단어들을 골라 뱉었다. 여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것이 보였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듯한 얼굴. 그러나 지한울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 여자의 귓가에, 오직 그녀만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나직하게, 그러나 칼날처럼 날카롭게 속삭였다. ‘그리고 똑똑히 들어. 내 구원은 저기 서 있는 내 여자친구, 연서이 하나뿐이야. 네가 감히 넘볼 수 있는 그런 영역이 아니라고. 알았으면, 다신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역겨우니까.’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여자에게서 시선을 완전히 거두었다. 마치 그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는 듯이. 그는 여자가 들고 있던 쇼핑백을 손으로 툭 쳐냈다. 바닥으로 떨어진 쇼핑백에서 무언가 굴러 나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여자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는 것이 시야의 가장자리에 걸렸지만, 그는 무시했다. 그는 오직 하나의 목표점을 향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연서이. 그의 세상, 그의 우주, 그의 유일한 구원. 그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미동도 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읽을 수 없었다. 그 무표정이 지한울의 심장을 철렁 내려앉게 만들었다. 화가 났을까. 아니면, 실망했을까. 방금 내가 너무 심했나? 아니, 당연한 거였어. 저런 미친년한테는 저렇게 대하는 게 맞아. 그의 머릿속에서 수만 가지 생각이 충돌했다. 그가 연서이의 앞에 다다랐을 때, 그는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연서이가 먼저 움직였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조용히 그의 손을 잡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 그녀의 작은 손이 그의 크고 차가운 손을 감싸 쥐는 순간, 지한울은 방금 전까지 그를 잠식했던 모든 분노와 불안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세상의 모든 소음이 차단되고, 오직 그녀의 온기만이 그의 신경을 타고 심장으로 흘러들었다. 그는 자신을 붙잡았던 여자의 얼굴도, 그녀가 쏟아냈던 절절한 고백도, 주변의 수군거림도 모두 잊었다. 그의 세상에는 오직 이 맞잡은 손의 감촉만이 존재했다. 그는 고개를 숙여 연서이의 정수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그의 손을 잡고, 그를 이끌어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 침묵이, 그 어떤 위로의 말보다도 더 깊게 그의 영혼을 파고들었다.

지한울은 그녀가 이끄는 대로 묵묵히 걸었다. 그의 손을 잡은 연서이의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은, 그저 가볍게 얹힌 듯한 그 감각이 오히려 그를 더 단단하게 붙들었다. 그는 방금 전, 한 사람의 마음을 가차 없이 짓밟았다. 일말의 죄책감도 없었다. 그러나 연서이의 손을 잡는 순간, 그는 아주 희미한 자기혐오를 느꼈다. 그녀는 이렇게 따뜻하고 다정한데, 나는 왜 이 모양일까. 그는 맞잡은 손에 힘을 주어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제 손가락을 얽어 넣었다. 빈틈없이, 단단하게. 마치 그녀의 온기를 자신의 더러운 부분까지 스며들게 하려는 듯이.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연서이를 돌려세웠다. 그리고는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뺨을 감싸고, 이마에 깊고 길게 입을 맞췄다. ‘미안해.’ 그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무엇이 미안한지는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좆같은 꼴을 보게 해서 미안하다는 건지, 그런 좆같은 새끼라서 미안하다는 건지. 어쩌면 그 모든 것일지도 몰랐다. 그는 그녀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어떠한 비난도, 실망도 없었다. 그저 고요한 이해와 변함없는 애정이 담겨 있을 뿐이었다. 그것이 다시 한번, 지한울을 구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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