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서이에게.

이 편지를 니가 읽을 일은 없겠지. 애초에 보낼 생각으로 쓰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이 새벽에 담배 연기처럼 흩어지는 생각을 어디다 붙잡아두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아서 쓰는 거니까. 작업실은 존나게 조용하고, 방금 전까지 니가 앉아있던 소파의 쿠션만 병신같이 꺼져 있어. 니가 남기고 간 온기 같은 건 이미 이 빌어먹을 냉방에 다 식어버렸는데, 왜 니 냄새는 아직도 여기 떠다니는 건지 모르겠다. 샴푸 냄새랑, 니 살 냄새랑, 아주 희미하게 섞인 베이스 스트랩의 가죽 냄새. 씨발, 나 진짜 변태 새끼가 다 된 것 같아. 그냥 숨만 쉬는데도 니 생각이 나. 니가 튕기고 간 베이스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아. 둥, 둥, 하고 내 심장 뛰는 소리랑 똑같이.

오늘도 너는 내 곡 위에 네 손가락을 얹었지. 내가 만든 비트랑 멜로디 위에, 니가 베이스 라인을 쌓아 올리는 걸 보고 있으면 이상한 기분이 들어. 내 머릿속에서 태어난, 어둡고 축축하기만 한 이 공간에 니가 들어와서 창문을 열고 햇빛을 들이는 것 같아. 나는 원래 어두운 게 익숙한 놈인데, 니가 만들어내는 저음의 울림은 어둠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게 만드는 이상한 힘이 있어. 존나 따뜻하고, 단단하고, 또… 외로워. 니가 연주하는 소리는 그래. 분명히 수많은 음들이랑 섞여서 우리 귀에 닿는데, 왜 니 베이스 소리만 혼자 따로 떨어져서 고고하게 들리는 걸까. 마치 너처럼. 많은 사람들 속에 섞여 있어도 너 혼자만 다른 조명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여. 나한테만 그렇게 보이는 건가? 씨발, 모르겠다. 그냥 그렇게 느껴져.

가끔 니 손가락을 봐. 베이스 줄을 잡느라 생긴 굳은살이 박인 그 작고 하얀 손. 처음 봤을 땐 그냥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아니야. 그 굳은살 하나하나가 니가 혼자 버텨낸 시간처럼 보여서,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 얼마나 단단할까, 또 얼마나 아팠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니 손을 쳐다보고 있어. 그러면 너는 또 내가 뭘 보는지도 모르고 그냥 씩 웃어주지. 그럴 때마다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졌다가 다시 튀어 오르는 기분이야. 병신같이. 너는 내가 이런 생각 하는 거 꿈에도 모르겠지. 그냥, 좀 특이하고 까칠한데 의외로 잘 챙겨주는 오빠. 딱 그 정도로 생각하겠지. 그게 맞아. 그게 맞는 건데, 가끔은 그 이상이었으면 좋겠다는 미친 생각을 해. 니가 내 음악의 일부가 아니라, 내 인생의 일부가 됐으면 좋겠다는 그런 같잖은 생각.

니가 웃을 때마다 세상의 모든 소음이 한순간에 멈추는 것 같아. 시끄러운 클럽 안에서도, 정신없는 녹음실 안에서도, 니 웃음소리 하나만 선명하게 들려. 그건 어떤 주파수를 가지고 있길래 내 귀에만 이렇게 정확히 꽂히는 걸까. 나는 원래 시끄러운 거 존나 싫어하는데, 니 웃음소리는 예외야. 하루 종일이라도 들을 수 있을 것 같아. 니가 웃으면 나도 모르게 따라 웃고 있어. 내가 왜 웃는지도 모르고, 그냥 바보처럼. 그러다 문득 정신 차리고 정색하면 니가 또 왜 그러냐는 듯이 쳐다보지. 그럼 난 또 씨발, 아무것도 아니라고 둘러대고. 이런 병신 같은 짓을 매일 반복하고 있어. 니 앞에서만 서면 나는 그냥 열일곱 살짜리 애새끼가 되는 것 같아. 아무것도 가진 것 없고, 가진 거라곤 자존심밖에 없어서 그걸로만 잔뜩 갑옷을 두른, 그런 등신.

너한테 내 옛날이야기 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 내가 얼마나 좆같은 환경에서 자랐는지, 왜 이렇게 삐뚤어진 새끼가 됐는지. 근데 막상 니 앞에 서면 입이 안 떨어져. 내 더러운 과거를 꺼내서 너한테 보여주는 순간, 니가 지금 나를 보는 그 눈빛이 변할까 봐 무서워. 동정이나 연민 같은 거, 나는 그런 거 존나 싫어하거든. 근데 너라면, 니가 보내는 동정이라면 그것마저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 무서워. 너한테는 그냥 멋지고 잘나가는 래퍼이고 싶어. 돈 많고, 여자 많고, 세상 무서운 거 없는 그런 새끼. 근데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껍데기뿐인 새끼야. 그 껍데기 안에는 아직도 애비한테 쳐맞던 열일곱의 내가 울고 있어. 그 울음소리를 들키고 싶지 않은데, 너한테는 들렸으면 좋겠어. 이 씨발, 모순적인 마음을 너는 알까. 알 리가 없지.

음악 얘기를 하다가 니가 문득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볼 때가 있어. 내 가사에 대해 물어볼 때. ‘이 가사 진짜예요?’ 하고 물어볼 때. 그럴 때마다 나는 거짓말을 해. 그냥 컨셉이야, 상상해서 쓰는 거지, 하고. 근데 사실 그거 다 내 얘기거든. 죽고 싶을 때마다, 세상이 나를 버렸다고 생각될 때마다 갈겨쓴 문장들이거든. 그걸 너한테는 차마 말 못 하겠어. 내 가장 어둡고 비참한 부분을 너한테 보여주는 거잖아. 근데 니가 내 가사를 좋아한다고 말해줄 때, 그 안에 담긴 감정이 느껴진다고 말해줄 때, 나는 구원받는 기분이 들어. 더러운 시궁창에 처박혀 있던 나를 누군가가 맨손으로 건져 올려주는 기분. 그게 너라서 다행이라고, 수백 번은 더 생각했어. 그래서 자꾸 너한테 내 곡을 들려주고 싶고, 니 베이스 소리를 입히고 싶어. 내 음악은 너를 만나야 비로소 완성되는 것 같아.

오늘 니가 돌아가고 나서, 니가 마시던 생수병을 한참 동안 쳐다봤어. 니 립스틱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있는 그 병을. 그걸 버리지도 못하고 작업대 한쪽에 올려뒀어. 미친놈이지. 근데 어쩔 수가 없어. 니가 남기고 간 모든 흔적들이 나한테는 너무 소중해서. 니가 흥얼거리던 멜로디, 니가 남기고 간 베이스 악보, 심지어 니가 앉았던 소파 자국까지도. 이 모든 게 다 너라고 생각하면 함부로 대할 수가 없어. 나는 아마 평생 누구를 이렇게 좋아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좋아한다는 감정이 뭔지도 몰랐는데, 너를 보고 있으면 알 것 같아. 심장이 아플 정도로 누군가를 원하고, 그 사람의 모든 걸 알고 싶고, 또 내 모든 걸 보여주고 싶어 하는 이 감정. 이게 사랑이 아니면 씨발, 대체 뭔데.

이 편지는 아마 내일 아침이면 구겨져서 쓰레기통에 처박히겠지. 나는 또 아무렇지 않은 척, 어젯밤에 죽이는 트랙 하나 뽑았다며 너한테 연락할 거야. 그럼 너는 또 해맑게 웃으면서 작업실로 오겠지. 그걸로 됐어. 그냥 지금처럼만 내 옆에 있어 줘. 내 음악을 완성시켜주는 사람으로, 내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웃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사람으로. 언젠가 내가 이 모든 감정을 너한테 다 털어놓을 용기가 생기는 날이 올까? 모르겠다. 그냥 오늘은 니가 너무 보고 싶다, 서이야. 이 새벽이 지나면 또 아무것도 아닌 척해야 한다는 게 벌써부터 지긋지긋하다. 그냥, 씨발, 존나게 보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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