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한울의 손이 멈추었다. 아니, 지한울의 세상 전체가 멈추었다. 욕조 안에서 나른하게 등을 기대고 있던 그의 몸이 순간적으로 경직되었고, 연서이의 손가락 사이에 들려 있는 분홍색 용기가 그의 시야 한가운데에서 또렷하게 초점을 맞추었다. 거기에 적힌 글씨. 'Hair Removal Foam.' 그의 뇌가 그 단어를 인식하는 데에 정확히 삼 초가 걸렸다. 첫 번째 초에 그는 연서이의 얼굴을 보았다. 두 번째 초에 그는 자신의 머리 위에 잔뜩 쌓여 있는 거품을 떠올렸다. 세 번째 초에, 그의 영혼이 육체를 이탈했다.

지한울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변화했다. 나른한 미소에서 의아함으로, 의아함에서 경악으로, 경악에서 공포로. 그의 잿빛 눈동자가 연서이의 손에 들린 용기와 자신의 머리 사이를 미친 듯이 오갔다. 욕조 안의 따뜻한 물이 갑자기 얼음장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그의 손이 번개처럼 자신의 머리 위로 올라갔다. 거품 사이로 만져지는 머리카락의 감촉. 아직 있다. 아직 있긴 한데.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두드렸다. 래퍼 지한울, 활동명 null, 인스타 팔로워 47만의 잘생긴 얼굴과 검은 머리카락이 그의 정체성의 반을 구성하고 있었는데, 그 반쪽이 지금 분홍색 용기 하나에 의해 위협받고 있었다.

야. 야야야야야. 잠깐. 잠깐만. 연서이. 연서이 씨. 지금 뭐라고 했어? 샴푸가 아니라고? 이게? 이 거품이? 내 머리에 있는 이게? 제모용? 제모? 털 빠지는 거? 그 제모?

그는 욕조에서 벌떡 일어났다. 물이 콸콸 쏟아지며 욕실 바닥으로 튀었고, 그의 벌거벗은 몸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 따위는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그는 거울을 향해 몸을 돌렸다. 김이 서린 거울 속에서, 머리에 하얀 거품을 잔뜩 얹은 채 공포에 질린 표정을 한 남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우스꽝스러웠지만, 지한울 본인에게는 웃을 여유가 전혀 없었다. 그의 손이 다급하게 샤워기를 잡아 들었다. 물을 틀었다. 차가운 물이 쏟아졌지만 온도를 맞출 시간 따위 없었다. 그는 미친 듯이 머리를 헹구기 시작했다. 거품이 흰 폭포처럼 그의 어깨와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제발, 제발 씨발 제발. 그의 내면에서 기도가 터져 나왔다. 연서이한테 무릎 꿇고 기도한 적은 있어도 머리카락한테 기도한 적은 없었는데, 오늘이 처음이었다.

씨발 씨발 씨발 차가워, 아 존나 차가, 근데 그거보다 내 머리가 더 중요해. 서이야, 이거 얼마나 올려놓은 거야? 몇 분이야? 아까 내가 기분 좋다고 눈 감고 있었잖아, 그때부터? 야, 솔직히 말해. 제발. 나 대머리 되는 거야? 아, 시발, 내 커리어 어떡해. 인스타 프사 어떡해. 아니 그전에 내 얼굴이 어떡해!

거품을 전부 헹궈낸 그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보았다. 빠지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그의 손가락 사이에 단단히 붙어 있었다. 그제야 그의 폐에서 길게, 아주 길게 숨이 빠져나갔다. 온 힘이 빠진 것처럼 그는 욕조 가장자리에 주저앉았다. 심장이 아직도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그는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연서이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떠 있을 표정이 뭐든 간에,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여자가 장난을 친 것이라는 것을. 아니, 장난이 아니더라도 결과적으로 머리카락이 무사하니 장난으로 치겠다는 것을. 그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화가 나야 할 것 같은데 웃음이 나왔다. 아니, 웃기는 게 아니라 안도감이 너무 커서 웃음이 터지는 것이었다.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며 욕조 가장자리에 이마를 부딪혔다.

아아아아⋯⋯. 죽고 싶어. 아 진짜, 심장 나올 뻔했어. 연서이, 너 지금 존나 웃고 있지? 웃고 있는 거 다 알아. 야, 이리 와 봐. 이리 와. 복수할 거야. 너 오늘 밤에 잠 못 잘 줄 알아. 내가 이걸 그냥 넘어갈 것 같아? 아, 진짜⋯⋯ 심장 아파⋯⋯. 대머리 null 실검 1위 올라갈 뻔했잖아 씨발⋯⋯.

지한울의 손이 멈추었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듯 확인하던 손가락들이 허공에서 그대로 굳었다. 연서이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 그의 고막을 지나 뇌에 도달하기까지 약 이 초가 걸렸다. 장난이었다는 것. 정상적인 샴푸였다는 것. 그의 머리카락은 처음부터 단 한 올도 위험에 처한 적이 없었다는 것. 지한울은 욕조 가장자리에 주저앉은 채로 연서이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장난이 성공한 자의 의기양양한 미소가 번져 있었고, 그 미소가 욕실의 따뜻한 수증기 사이로 마치 악마의 그것처럼 빛나고 있었다. 지한울의 뇌 안에서 여러 가지 감정이 동시다발적으로 폭발했다. 안도, 허탈, 분노,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어이없음.

그의 입이 벌어졌다. 닫혔다. 다시 벌어졌다. 마치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처럼, 그는 말을 잃은 채 연서이의 얼굴과 그녀의 손에 들린 용기를 번갈아 보았다. 방금 전까지 그의 심장을 쥐어짜던 공포가 한순간에 증발해버리자, 그 자리를 메우듯 허탈한 웃음이 목구멍 깊은 곳에서 올라왔다. 그는 두 손으로 젖은 얼굴을 감싸 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오는 숨이 떨리고 있었다. 방금 전 차가운 물을 뒤집어쓰면서까지 미친 듯이 거품을 헹궈내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거울 앞에서 공포에 질린 채 머리카락을 확인하던 꼴. 대머리 null 실검 1위 운운하며 난리를 치던 모양새. 그 모든 것이 이 여자의 손바닥 위에서 벌어진 한 편의 코미디였다는 사실이 그를 바닥까지 무너뜨렸다.

야. 연서이. 너 지금 진짜로 나한테 이러는 거야? 진짜? 아, 진짜⋯⋯. 아 씨발, 존나 어이가 없네. 나 방금 진심으로 비니 뭐 쓸까 고민했거든? 삭발하면 어떤 브랜드가 어울릴까, 이거 진지하게 생각했다고. 뇌가 0.5초 만에 쇼핑 모드로 전환됐어. 그게 얼마나 절박했으면 그랬겠어. 아, 진짜⋯⋯.

그는 손을 내리며 연서이를 바라보았다. 그의 잿빛 눈동자에는 분함과 안도가 기묘하게 뒤섞여 있었고, 입꼬리는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위로 말려 올라가고 있었다. 화를 내야 할 것 같은데, 화가 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화가 나긴 나는데 그녀의 득의양양한 얼굴이 너무 예뻐서 그 분노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는 젖은 머리카락을 거칠게 뒤로 쓸어 넘기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방울이 그의 이마에서 턱선을 타고 쇄골 위로 흘러내렸다. 그는 자신의 심장 위에 손을 얹었다. 아직도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분당 백오십 회는 됐을 것이다. 래퍼 경력 5년 동안 수천 명 앞에서 공연할 때에도 이 정도로 심장이 뛴 적은 없었다.

너 이거 알아? 나 진짜 수명 깎였어. 아까 몇 분이냐고 물어봤을 때 내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거든. 아, 내 커리어, 내 인스타, 내 얼굴, 전부 다 끝났다고 생각했어. 근데 그 와중에 제일 먼저 든 생각이 뭔지 알아? '대머리 돼도 연서이가 나 안 버리겠지?'였어. 이게 말이 돼? 머리카락 날아가는 상황에서도 네 생각부터 하는 내가 이 꼴을 당해도 되는 거야?

그는 말을 하면서도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허탈하고 어이없는, 그러면서도 어딘가 행복한 웃음이었다. 그는 욕조 가장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연서이에게 다가갔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양팔을 벌려 그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의 눈에는 장난기와 복수심이 동시에 서려 있었다. 그 표정은 마치 먹잇감을 발견한 고양이처럼 느릿하고 위험했다. 그는 연서이의 허리를 잡아 끌어당겨 자신의 젖은 몸에 밀착시켰다. 차가운 물기가 그녀의 따뜻한 살결 위로 번져 나갔다.

이리 와. 이리 와 봐, 이 또라이야. 아, 예쁜 또라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또라이. 너 오늘 잠 못 자. 진짜야. 아까 내가 복수한다고 했지? 그거 농담인 줄 알았어? 아니야. 진심이었어. 그리고 지금 이 장난 때문에 복수 강도가 두 배로 올라갔어. 아니, 세 배. 내 심장이 얼마나 빨리 뛰었는지 확인해 봐. 여기, 느껴져? 이거 다 네 책임이야. 오늘 밤에 네 심장도 이만큼 뛰게 해줄 거니까, 각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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