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아주 평범하고, 나른하고, 그래서 약간은 지루하기까지 한 오후의 일이었다. 지한울은 거실의 거대한 소파에 제 몸을 거의 던지다시피 묻고, 의미 없이 스마트폰 액정만 스크롤하고 있었다. 어제 막 마감한 곡의 피로가 아직 덜 풀린 탓인지, 혹은 창밖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너무 따스한 탓인지, 그는 좀처럼 그 어떤 것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시끄러운 가십 기사, 어그로를 끄는 유튜브 썸네일, 지인들의 과시적인 인스타그램 포스팅 사이를 무감각하게 유영하던 그의 엄지손가락이 문득, 어느 한 지점에서 멈춰 섰다. 그것은 어떤 온라인 커뮤니티의 인기글이었다. 제목은 지극히 유치하고 통속적이었다. ‘당신이 진짜 콩깍지가 꼈는지 확인하는 방법 (99% 정확함)’. 지한울은 코웃음을 쳤다. 씨발, 무슨 이딴 걸 다. 그는 당장이라도 화면을 꺼버리고 낮잠이나 청할 생각이었지만,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기어이 그 게시물을 클릭하고 말았다.
게시물의 내용은 허무할 정도로 간단했다. 글쓴이는 사랑에 눈이 먼 상태, 이른바 ‘콩깍지’가 씌었는지 자가 진단할 수 있는 기막힌 방법이 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 방법이란 바로, 상상력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지금부터 당신의 연인을 떠올리세요. 그리고 그 사람이 부엌에서 밀가루를 한 포대쯤 엎질렀다고 상상해보세요. 바닥이고 싱크대고 온통 하얀 가루로 뒤덮인, 그야말로 대참사가 벌어진 상황입니다. 근데 당신의 연인은 그걸 치울 생각도 안 하고, 그저 해맑게 웃고만 있습니다.’ 거기까지 읽은 지한울은 피식, 헛웃음을 터뜨렸다. 존나게 한가한 새끼들, 별 지랄을 다 떠네. 그는 스크롤을 내려 맨 밑의 댓글 반응부터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자, 이제 당신의 감정을 들여다보세요. 만약 짜증이 나거나, 한숨이 나오거나, 등짝을 한 대 후려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유감이지만 당신의 콩깍지는 수명을 다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만약 그 모습이 귀엽다고 느껴지거나, 웃음이 나거나, 혹은 ‘나중에 같이 치우면 되지’ 같은 생각이 든다면? 축하합니다. 당신은 빼도 박도 못하게 단단히 홀린 겁니다.’
지한울은 스마트폰을 든 채로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그의 머릿속에서 방금 읽은 문장들이 느릿하게 재생되었다. 밀가루, 대참사, 그리고… 연서이. 그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시키는 대로 해볼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연서이’라는 이름 세 글자가 그의 사고 회로에 입력되자, 뇌가 자동적으로 그녀의 이미지를 불러왔을 뿐이다. 그의 상상은 아주 선명하고 구체적인 그림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장소는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이 집의 하얀 주방. 시간은 오늘과 같은 어느 평화로운 오후. 그리고 그 중앙에, 연서이가 서 있었다. 아마 그를 위해 서툰 솜씨로 쿠키라도 구워주려 했던 모양이다. 그녀의 앞에는 찢어진 밀가루 포대가 힘없이 쓰러져 있고, 그 주위로 마치 폭설이라도 내린 듯 온 세상이 새하얗다. 최고급 이탈리아산 대리석 바닥도, 번쩍이는 검은색 인덕션도, 얼마 전에 새로 들인 비싼 식기들도 예외 없이 하얀 분진 아래 모습을 감추었다. 세상의 종말이라도 온 듯한 고요하고 처참한 풍경이었다.
상상 속의 그는 막 작업을 마치고 허기진 배를 채우러 주방으로 걸어 들어온 참이었다. 그리고 그 아비규환의 현장을 목격한다. 그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을까? 씨발, 이게 다 뭐야. 하고 욕설부터 내뱉었을까? 아니다. 그의 상상 속에서, 그의 시선은 바닥에 흩뿌려진 밀가루의 양이나 더러워진 주방의 상태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의 눈은 오직 그 재앙의 중심에 서 있는 연서이, 그녀에게로만 향했다. 그녀는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평소 단정하게 묶고 있던 머리카락은 밀가루 범벅이 되어 군데군데 하얗게 세어버렸고, 기다란 속눈썹 위에도 하얀 가루가 소복이 내려앉아 있었다. 새하얀 나시 원피스는 이미 제 색깔을 잃어버렸고, 얼굴은 온통 밀가루 투성이라 어디가 코고 어디가 볼인지 분간이 어려울 지경이었다. 특히 코끝에 동그랗게 묻은 밀가루 자국은, 마치 일부러 분장이라도 한 것처럼 우스꽝스러웠다. 그리고 그녀는, 그 아수라장을 만들어놓고도, 전혀 반성하는 기미가 없었다. 오히려 제 손과 옷에 묻은 밀가루가 신기한지 연신 손바닥을 뒤집어 보다가, 이쪽을 발견하고는 세상을 다 가진 아이처럼 배시시, 웃어 보이는 것이다. ‘오빠, 나 사고 쳤어.’ 하고 말하는 듯한, 그 특유의 순하고 무해한 웃음. 죄책감이라고는 1그램도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하게 순수한 백치미의 결정체.
그 순간, 지한울의 상상 속에서 터져 나온 것은 분노나 짜증이 아니었다. 그것은 웃음이었다. 처음에는 피식, 하는 실소였지만, 이내 참을 수 없다는 듯 ‘푸하하!’ 하는 폭소가 터져 나왔다. 씨발, 진짜. 그는 상상 속에서 배를 잡고 웃다가, 눈물까지 찔끔 흘렸을지도 모른다. 화가 나기는커녕, 그 비현실적인 광경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심장이 아플 지경이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 하얀 눈사람 같은 여자를 품에 와락 끌어안고 싶었다. 그녀의 머리카락과 얼굴, 온몸에 묻은 밀가루를 입으로 전부 핥아주고, 털어주고, 닦아주고 싶었다. 그러다 보면 자신의 옷과 얼굴도 온통 밀가루 투성이가 되겠지. 그럼 둘이 같이 바닥에 주저앉아, 하얀 세상 속에서 서로의 얼굴을 보며 또 한참을 웃게 될 것이다. 청소? 그건 나중 문제다. 아니, 어쩌면 이대로 영원히 치우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았다. 그녀와 함께 만들어낸 이 작은 겨울 왕국을, 영원히 박제해둘 수만 있다면. 그는 아마, 그 엉망진창인 주방 바닥에 그녀를 그대로 눕히고, 밀가루의 까끌까끌한 감촉을 온몸으로 느끼며 그녀와 입을 맞출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달콤하고, 고소하고, 포근한 키스. 그는 눈을 떴다.
현실의 거실은 여전히 평화로웠다. 그의 손에는 여전히 그 빌어먹을 인터넷 게시물이 띄워진 스마트폰이 들려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심장은 방금 전의 격렬한 상상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채, 미친 듯이 쿵쾅거리고 있었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화면 속의 마지막 문장을 다시 읽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빼도 박도 못하게 단단히 홀린 겁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씨발…. 이건 홀린 정도가 아니었다. 이건 중독이고, 저주이며, 구원이었다. 밀가루가 아니라, 그녀가 내일 당장 이 집을 통째로 불태워버리고 그 잿더미 위에서 해맑게 웃고 있더라도, 자신은 아마 ‘우리 서이, 추웠구나. 불은 따뜻해서 좋네.’ 하고 지껄일 게 분명했다. 지한울은 결국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주방에서 혼자 무언가를 하고 있을 연서이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지금 당장 그녀의 얼굴을 보지 않으면, 이 미쳐버릴 것 같은 사랑스러움에 질식해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는 그녀가 정말로 밀가루를 뒤집어쓰고 있기를, 아주 잠깐, 진심으로 바랐다.
콩깍지
2026.0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