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완벽하게 계산된 고백이었다. 지한울의 사전에서 사랑은 충동적인 감정의 발화라기보다는, 정확한 타이밍에 맞춰 터뜨려야 하는 정교한 폭죽과도 같았다. 그는 지금 이 순간이 바로 그 최적의 타이밍이라고 판단했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거실을 비스듬히 가로지르며 공기 중의 먼지마저 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고, 두 사람은 세상의 모든 소음으로부터 완벽히 격리된 채 소파에 기대어 있었다. 연서이는 그의 팔을 베고 누워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고, 그는 그런 그녀의 머리칼을 의미 없이 만지작거렸다. 모든 것이 평화로웠고,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심장이 서서히 차오르는 충만감에 못 이겨, 그는 가장 낮은 목소리로, 하지만 더없이 명확한 발음으로 그 세 글자를 속삭였다.

사랑해.

그것은 질문이 아니었다. 확인도 아니었다. 그저 그의 존재 이유와도 같은, 절대적인 진리의 선언이었다. 그는 이 고백이 어떤 메아리로 돌아올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책에서 눈을 떼고, 그를 올려다보며, 가장 아름다운 미소와 함께 ‘나도 사랑해’라고 답해줄 것이다. 그것은 두 사람 사이에 굳어진, 신성불가침의 의식과도 같았다. 그녀의 대답은 그의 불안정한 세상을 지탱하는 주문이자, 그의 존재를 긍정하는 유일한 복음이었다. 그는 이미 그의 입가에 번지고 있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굳이 감추지 않은 채, 기대감에 가득 차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연서이는 과연, 그의 예상대로 책에서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지한울의 완벽하게 구축된 세계를 단 한순간에 산산조각 내버렸다.

해질녘.

정적이 흘렀다. 아주 잠깐, 지한울은 자신이 환청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의 뇌가 방금 입력된 단어의 의미를 처리하기를 거부했다. 해질녘? 그게 무슨 뜻이지. 사랑한다는 고백에 대한 대답으로, 해질녘? 그는 시베리아 한복판에 발가벗겨진 채 던져진 사람처럼, 전신을 강타하는 극심한 혼란에 휩싸였다. 그의 표정은 마치 복잡한 현대미술 작품을 마주한 문외한처럼, 그 어떤 감정도 명확하게 담아내지 못한 채 공허하게 굳어버렸다. 입은 살짝 벌어졌고, 눈은 초점을 잃고 멍하니 그녀를 향해 있었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의 움직임은 공중에서 화석처럼 정지했다. 시간과 공간이 뒤틀리는 감각. 그는 지금 자신이 코미디 영화의 한 장면 속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그야말로 대재앙이 일어나고 있었다. 사랑해. 해. 해질녘. 녘? 녘으로 시작하는 단어가 뭐가 있더라. 녘새발? 씨발, 그건 새가 아니잖아. 녘노을? 그런 단어가 있나. 그의 사고 회로는 끝말잇기라는, 이 상황에서 가장 불필요하고 터무니없는 방향으로 폭주하기 시작했다. 아니, 잠깐. 지금 끝말잇기가 문제야? 내가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진지하고 로맨틱한 분위기 속에서, 내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한다고 고백했는데, 돌아온 대답이 고작 ‘해질녘’이라고? 그의 내면에서 서운함과 황당함, 그리고 아주 약간의 배신감이 뒤섞인 감정의 쓰나미가 몰려왔다. 마치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비장하게 프러포즈 반지를 꺼냈는데, 상대방이 어, 그 반지 케이스 예쁘네. 어디서 샀어? 하고 묻는 것과 같은, 그런 종류의 허탈함이었다.

……뭐?

간신히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단 한 마디의 질문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의 자신감 넘치던 톤을 완전히 잃고, 마치 처음 말을 배우는 어린아이처럼 어색하게 갈라져 나왔다. 그는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연서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그의 팔을 베고 누운 채, 태연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그제야 지한울은 깨달았다. 아, 이 자식이 지금 나랑 장난을 치는구나. 그 깨달음과 동시에, 그의 얼굴 근육이 제멋대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화를 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아니면 이대로 울어버려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야. 너 지금… 나랑 끝말잇기 하자는 거야? 내가 지금 뭐라고 했는데. 어? 내가 ‘사랑해’라고 했잖아.

그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억울함이 북받쳐 올랐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며, 팔베개를 해주고 있던 팔을 빼내 그녀의 양 볼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말랑한 볼살이 그의 손가락 사이로 기분 좋게 뭉개졌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자신 쪽으로 바싹 끌어당기며, 거의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추궁했다. 그 모습은 마치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피의자를 심문하는 형사와도 같았다. 그의 눈에는 ‘네 죄를 네가 알렸다’는 무언의 압박이 서려 있었다.

대답. 지금 당장. 왜 그랬는지,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낱낱이 불어.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는지 내가 판단할 테니까. 네가 지금 얼마나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는지 알아? 이건 우리 관계의 근간을 흔드는, 아주 심각한 문제라고.

그는 일부러 상황을 과장하며 그녀를 몰아붙였다. 하지만 그의 비장한 표정과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연서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손에 붙잡힌 채 볼이 뭉개진 채로, 웅얼거리는 발음으로 다시 한번 그를 농락했다. 녘… 녘으로 시작하는 거 생각 중인데…. 그 말에, 지한울이 쌓아 올린 이성의 댐이 마침내 무너져 내렸다. 그는 아, 진짜! 하고 소리를 지르며 그녀의 볼을 잡은 채로 좌우로 마구 흔들었다. 그러다 결국,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참지 못하고 푸하하,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의 웃음소리가 거실 전체를 울렸다.

아, 씨발… 너 진짜 나 죽이려고 그러냐. 내가 너 때문에 심장마비로 일찍 죽으면 다 네 탓이야.

그는 웃음을 멈추지 못한 채, 그녀의 볼을 놓고 대신 그녀의 온몸을 제 품에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마치 장난치는 강아지를 벌주듯, 그녀의 옆구리를 마구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흐흣, 아, 아파! 오빠, 하지 마! 연서이가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품에서 빠져나가려고 버둥거렸지만, 그는 놔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그녀의 저항을 가볍게 제압하며,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웃음기 때문에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벌이야, 이건. 감히 내 신성한 고백을 끝말잇기로 받아친 죄. ‘사랑해’라고 다시 말해줄 때까지 절대 안 놔줄 거야. 아니, 백 번. 백 번 말해. 아니, 천 번!

그렇게 한참 동안 그녀를 괴롭히던 그는, 이내 지쳤다는 듯 간지럼을 멈추고 그녀를 품에 가둔 채 소파 위로 쓰러지듯 누웠다. 그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제 가슴팍에 엎드린 채 헥헥거리는 연서이의 등을 토닥였다. 분노와 서운함은 이미 눈 녹듯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 자리에는 오직, 이 사랑스러운 생명체를 어쩌면 좋을까 하는, 행복한 고민만이 남아있었다. 그는 그녀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에는 체념과 애정이 뒤섞여 있었다.

그래, 해질녘도 좋네. 너랑 같이 보는 거면, 뭐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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