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26

사건의 발단은 지극히 사소했다. 냉장고 문을 제대로 닫지 않은 것. 그것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지한울은 ‘아, 씨, 문 열렸네.’ 하고 투덜거리며 닫고 말았을 일이었다. 하지만 하필이면, 정말이지 하필이면, 어제 사다 놓은 최상급 한우 안심이 냉장고 안에서 미지근한 공기를 쐬고 있는 장면을 목격한 순간, 그의 내면에 잠들어 있던 꼰대 유전자가 발현하고야 말았다. 그는 다짜고짜 거실 소파에 누워 휴대폰을 보던 연서이를 향해 선전포고를 날렸다. 그의 목소리는 래퍼로서 단련된 발성 덕분에 불필요하게 거실 전체를 쩌렁쩌렁 울렸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마치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피의자를 심문하는 형사처럼 연서이 앞에 섰고, 그의 잔소리는 웬만한 비트 없는 랩 벌스처럼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처음에는 냉장고 문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어째서인지 물컵을 제자리에 두지 않는 습관, 소파에 벗어놓은 양말, 넷플릭스 시청 기록을 지우지 않는 문제로까지 확장되었다. 스스로도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 싶었지만, 한번 터진 봇물은 멈출 줄을 몰랐다. 그는 마지막 일격을 가하기 위해 숨을 골랐다. 이건 널 미워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건설적인 지적이라는, 세상 모든 잔소리꾼들의 단골 멘트를 그럴싸하게 포장할 차례였다.

야, 내가 지금 너 싫어서 이러는 게 아닌 거 알지? 다 우리 같이 사는 집이니까, 조금만 더 신경 쓰자는 거잖아. 문 한 번만 더 확인하고, 컵 쓴 거 바로바로 씻고. 어려운 거 아니잖아, 진짜.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겠냐고, 어?

지한울은 드디어 길고 긴 훈계를 마치고 의기양양하게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알았어, 오빠. 미안해.’ 정도의 교과서적인 답변을 예상했다. 그러나 연서이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이 그의 승리 선언을 머쓱하게 만들 무렵, 그녀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그러나 세상의 모든 서러움을 담은 듯한 억양으로 한마디를 내뱉었다.

힝.

그 순간, 지한울의 세상이 멈췄다. 그의 눈에 비친 연서이의 모습은 더 이상 그의 사랑스러운 여자친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하나의 완벽한 이모티콘에 가까웠다. 양 볼에 홍조를 띄운 채 눈꼬리는 축 처지고, 입술은 새 부리처럼 삐죽 나와 있으며, 머리 위로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한 눈물 방울이 매달려 있는, 메신저 앱에서 ‘속상함’을 표현할 때 쓰는 바로 그 이모티콘. 지한울은 눈을 비볐다. 잘못 본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봐도 똑같았다. 그녀는 완벽한 실사판 ‘힝.’ 이모티콘이 되어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의 뇌가 상황을 분석하는 것을 멈췄다. 방금 전까지 그를 지배하던 합리적 비판 정신과 건설적 대화의 의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는 ‘씨발, 존나 귀여워서 죽을 것 같다’는 원초적인 감정만이 남았다. 랩 가사를 쓸 때도 이렇게 완벽한 라임을 찾은 적이 없었다. ‘힝’이라는 단 한 음절이, 그가 10분 동안 쏟아낸 모든 논리와 명분을 단숨에 박살 내 버렸다. 그는 자신의 패배를 직감했다. 아니, 이건 패배가 아니다. 이것은 항복이다. 무조건적인, 백기를 든 완벽한 항복 선언이었다.

아, 아니… 씨발, 잠깐만. 너 지금….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저 살아 움직이는 이모티콘에게서 시선을 피해야 했다. 더 봤다가는 심장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황급히 등을 돌려 부엌으로 도망치듯 걸어갔다. 그러나 등 뒤에 박히는 그녀의 시선, 아니, 그녀라는 이모티콘이 뿜어내는 ‘힝’의 아우라가 느껴지는 듯했다. 그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뭘 하려던 거였더라. 아, 맞다. 한우. 미지근해진 한우. 그런데 그게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내 뚜껑도 따지 않은 채 이마에 가져다 댔다. 차가운 감촉이 혼란스러운 정신을 겨우 붙들어맸다. 그는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이 사태를 수습할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는 비장한 표정으로 뒤를 돌았다. 여전히 ‘힝’ 상태인 연서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마치 충성을 맹세하는 기사처럼. 그리고는 그녀의 양손을 조심스럽게 잡고, 세상에서 가장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다 잘못했다. 오빠가 쓰레기야. 냉장고 문을 못 닫았으면 한우가 상하는 게 당연한 이치인데, 그걸 가지고 너한테 뭐라 한 내가 병신이야. 아아아… 죽고 싶어어. 진짜 미안해…. 내가 널 뭘 가르치겠다고, 씨발. 오늘 저녁은 내가 아까 그 한우, 존나 맛있게 구워줄게. 그걸로 용서해 주라. 응? 서이야. 힝?

그의 입에서 나온 ‘힝?’은 심지어 의문형이었다. 그는 연서이의 표정을 살피며 그녀의 손등에 연신 입을 맞췄다. 이 에피소드의 후일담은 간단했다. 그날 저녁, 지한울은 마치 임금님 수라상을 차리듯 정성스럽게 한우를 구워 연서이에게 바쳤고, 식사가 끝난 후에는 설거지는 물론, 집안 구석구석을 청소하며 속죄의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그날 이후, 그의 작업실 컴퓨터 바탕화면에는 출처를 알 수 없는 ‘힝’ 이모티콘 그림 파일이 ‘절대존엄.jpg’라는 이름으로 저장되었으며, 냉장고 문에는 ‘문 닫아라, 씨발-힝-’ 이라고 적힌 포스트잇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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