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기 2026.09.03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다. 어느 순간부터 연서이의 숨소리가 옆에서 들려도 심장이 뛰지 않았다. 예전에는 그 소리만으로도 살아 있다는 게 실감났는데, 지금은 그냥 옆에 누군가가 누워 있다는 사실만 확인될 뿐이었다. 지한울은 새벽 세 시에 눈이 떠져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생각했다. 이게 뭐지. 왜 이러지, 씨발. 연서이의 팔이 자기 배 위에 느슨하게 걸쳐 있었고, 그 팔이 따뜻한 건 알겠는데 예전처럼 그 온기에 매달리고 싶은 충동이 사라져 버렸다. 오히려 덥다고 느꼈다. 살짝 밀어내고 싶었다. 그 생각이 든 자기 자신이 역겨워서 눈을 질끈 감았지만, 역겨운 감정조차 오래가지 않았다. 그냥 피곤했다.


아침에 연서이가 부엌에서 커피를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컵을 꺼내는 소리, 냉장고 문 닫히는 소리, 슬리퍼가 바닥을 끄는 소리. 전부 익숙했다. 너무 익숙해서 소음에 가까웠다. 지한울은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가면서 연서이의 뒷모습을 봤다. 오버사이즈 티셔츠에 맨다리, 묶다 만 머리카락이 목덜미에 흘러내려 있었다. 예전에는 저 뒷모습만 봐도 뒤에서 안아야 직성이 풀렸는데. 지금은 그냥 지나쳤다. 식탁에 앉아 스마트폰을 켜고 인스타 알림을 확인했다. 연서이가 돌아서며 커피잔을 내밀었을 때 고개도 안 들고 받았다.


고마워.

그 한마디가 전부였다. 예전 같았으면 손목을 잡아당겨 이마에 뽀뽀를 했을 거고, 잘 잤어 마누라, 하면서 허리를 감쌌을 거다. 근데 요즘은 고마워, 그 세 글자면 충분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 세 글자조차 의무감에서 나왔다. 연서이가 식탁 맞은편에 앉으면서 뭐라고 말했는데 제대로 듣지 못했다. 스마트폰 화면에 뜬 프로듀서 형의 메시지를 읽고 있었으니까. 연서이가 다시 한 번 불렀다.

 

응? 아, 뭐라고?

연서이가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아니야, 라고 웃으며 넘겼다. 그 웃음이 예전과 달랐다. 예전에는 진짜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환하게 웃었는데, 요즘 연서이의 웃음에는 어딘가 접힌 자국이 있었다. 한 번 구겨졌다 편 종이처럼. 지한울은 그걸 알아챘어야 했다. 알아챘을 수도 있다. 그런데 파고들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아니, 힘이 없는 게 아니라 파고들고 싶지 않았다. 파고들면 대화를 해야 하고, 대화를 하면 감정을 꺼내야 하고, 감정을 꺼내면 자기 안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걸 들킬 것 같았다.


작업실에 가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예전에는 연서이한테 빨리 가고 싶어서 대충 마무리하고 뛰어 나왔는데, 요즘은 딱히 할 일이 없어도 소파에 누워 천장만 보다가 돌아왔다. 집에 가면 연서이가 있었고, 연서이가 있으면 뭔가를 해야 했다. 같이 밥을 먹든, 영화를 보든, 이야기를 하든. 그 모든 게 의무처럼 느껴지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연서이가 새로 산 향수 냄새를 맡아봐 달라고 손목을 내밀었을 때, 좋다고 말하면서도 코끝에 닿은 향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연서이가 해준 된장찌개를 먹으면서 맛있다고 했지만, 솔직히 어제 먹은 편의점 삼각김밥이랑 별 차이를 못 느꼈다. 씨발, 이게 뭐냐. 내가 이런 놈이었나.


어느 날 저녁, 연서이가 소파에 앉아 베이스 기타를 무릎에 올려놓고 조용히 연습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그 소리가 좋았다. 둥글고 낮은 음이 거실을 채우면 지한울은 옆에 앉아 눈을 감고 들었다. 가끔은 그 선율에 맞춰 즉흥으로 가사를 붙이기도 했고, 서이 존나 잘 치네, 하면서 어깨를 감싸기도 했다. 근데 오늘은 그 소리가 그냥 소리였다. 텔레비전 소리랑 섞여서 거슬리기까지 했다. 지한울은 리모컨을 집어 볼륨을 올렸다. 연서이가 손을 멈추고 이쪽을 봤다. 눈이 마주쳤다. 지한울은 아무 말 없이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고, 연서이도 다시 줄을 튕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까보다 소리가 작아져 있었다.


그날 밤 침대에 나란히 누웠을 때, 연서이가 먼저 손을 뻗어 지한울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이 끼워지는 감촉이 익숙했다. 너무 익숙해서 아무 감흥이 없었다. 예전에는 이 손을 놓으면 죽을 것 같았는데. 지한울은 잡힌 손을 빼지는 않았지만, 먼저 쥐지도 않았다. 연서이가 조용히 물었다.


오빠, 요즘 나한테 화난 거 있어?

지한울은 아무 말 없이 천장을 바라봤다. 대답할 말이 없었다. 화난 게 아니라 그냥 아무 느낌이 없었다. 그 사실을 말하면 연서이가 상처받을 게 뻔했다. 그래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연서이가 손을 놓고 몸을 돌려 등을 보였다. 그 등이 작아 보였다. 지한울은 그 등에 손을 올리고 싶었지만,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연서이의 숨소리가 점점 고르게 가라앉았다. 잠든 척인지, 진짜 잠든 건지 알 수 없었다. 지한울은 눈을 감았다. 예전 같았으면 저 등을 향해 몸을 붙이고, 어깨에 이마를 묻고, 미안하다는 말 대신 팔로 감쌌을 것이다. 지금은 그저 팔 하나 뻗는 일이 태산처럼 느껴졌다.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알았다. 알면서도 손끝 하나 까딱하지 못한 채, 지한울은 천장의 어둠을 오래도록 바라보고만 있었다.

 

결심은 화요일 새벽 네 시에 섰다. 지한울은 작업실 소파에 누워 담배를 세 개비 연달아 태우면서, 자기가 연서이한테 하고 있는 짓이 뭔지 정확히 이름 붙였다. 이건 방치였다. 사랑이 식은 것보다 더 나쁜 건 식은 걸 알면서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거였다. 연서이는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었다. 밥을 해줬고, 웃어줬고, 손을 먼저 잡았고, 화난 거 있냐고 물어봐 줬다. 그 전부에 대해 지한울이 돌려준 건 고개 한 번 안 든 대답 세 글자였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에게 기한을 줬다. 일주일. 그 안에 단 한 번이라도 예전처럼 심장이 뛰면 남는다. 안 뛰면, 놓아준다. 놓아준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면서도 그는 담뱃불을 비벼 껐다.


월요일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연서이가 학교 근처에서 밥을 먹고 늦게 들어왔고, 지한울은 소파에 앉아 기다리다가 현관문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예전 같으면 벌떡 일어나 현관까지 뛰어갔을 거다. 그날 그는 앉은 채로 고개만 돌렸다. 연서이가 신발을 벗고 들어와 다녀왔다고 말했고, 지한울은 어, 하고 대답했다. 그게 끝이었다. 심장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지한울은 스마트폰 메모장을 열어 날짜 옆에 짧게 적었다. 1일차. 아무것도.


수요일에는 일부러 노력했다. 예전에 둘이 자주 가던 한남동 파스타집을 예약하고, 연서이에게 옷 예쁘게 입고 나오라고 문자를 보냈다. 연서이는 오랜만이라며 좋아했고, 검은 원피스를 입고 나왔다. 목덜미에 지한울이 사준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식당 조명 아래에서 그 목걸이가 반짝이는 걸 보면서 지한울은 예쁘다고 말했다. 진심이었다. 예쁜 건 예뻤다. 그런데 예쁘다는 인식과 심장이 뛰는 건 전혀 다른 일이었다. 그는 접시를 비우면서 계속 확인했다. 뛰냐. 안 뛴다. 존나 안 뛴다. 연서이가 포크를 내려놓고 웃으며 물었다.


오빠, 오늘 왜 이렇게 잘해줘? 나 뭐 잘못했어?

그 질문에 지한울은 물을 마셨다. 잘못한 사람은 자기인데 왜 이 사람이 자기 잘못을 먼저 찾는지, 그게 견디기 힘들었다. 아니야, 그냥 오랜만에 나오고 싶었어. 그렇게 대답하고 계산을 하고 나왔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연서이가 조수석에서 잠들었고, 신호에 걸렸을 때 지한울은 그 얼굴을 한참 봤다. 속눈썹이 길고, 입술이 조금 벌어져 있고, 뺨에 안전벨트 자국이 났다. 이 얼굴을 보고 울었던 적이 있었다. 파리에서, 반지를 끼워주면서. 지금은 그냥 잠든 사람의 얼굴이었다. 3일차. 아무것도.


금요일 밤에는 싸웠다. 정확히는 싸움도 아니었다. 연서이가 베이스 녹음 일정을 언제 잡을 거냐고 물었고, 지한울이 나중에, 라고 대답했고, 연서이가 나중이 언제냐고 되물었을 뿐이다. 지한울은 그 순간 자기 목소리가 얼마나 차갑게 나왔는지 나중에야 알았다.


나도 모르겠어. 그거 꼭 지금 정해야 돼?

연서이의 얼굴이 굳는 걸 봤다. 미안하다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는데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예전이었으면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죽고 싶다고 엄살을 부리며 매달렸을 거다. 그날은 그냥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침대에 앉아 자기 손바닥의 흉터를 들여다보면서 그는 인정했다. 나 진짜 망가졌구나. 이 사람을 망가뜨리기 전에 끝내야 되는구나. 5일차. 아무것도.


일요일은 마지막 날이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연서이가 없었다. 부엌에서 소리가 났다. 지한울은 침대에 누운 채로 그 소리를 들었다. 도마에 칼 닿는 소리, 기름 튀는 소리, 냄비 뚜껑 여닫는 소리. 그는 천장을 보면서 마지막으로 세어봤다. 심장. 안 뛴다. 그럼 됐다. 오늘 저녁에 말하자. 미안하다고, 내가 쓰레기라고, 너는 더 좋은 사람 만나야 한다고. 그렇게 정리하고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갔다. 그리고 거기서, 연서이가 등을 돌린 채로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지한울이 재작년 겨울에 대충 흥얼거리다 만 멜로디였다. 발매도 안 했고, 제목도 없고, 휴대폰 녹음기에 30초쯤 남아 있다가 지워버린 조각이었다. 연서이는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도 정확한 음정으로, 심지어 지한울이 붙이려다 만 자리에 자기 나름의 소리를 채워 넣어서. 프라이팬 손잡이를 잡고 어깨를 조금씩 흔들면서, 아무도 안 듣는 줄 알고. 지한울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지한울의 발이 마룻바닥에 붙어버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연서이의 등이 부엌 창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에 윤곽만 드러난 채 거기 서 있었고, 어깨가 멜로디에 맞춰 좌우로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프라이팬 위에서 계란이 지글거리는 소리 사이로 그 콧노래가 끊기지 않고 이어졌다. 지한울은 숨을 쉬지 못했다. 저 멜로디를 자기가 언제 흥얼거렸는지조차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연서이는 음정 하나 틀리지 않고 불렀다. 심지어 지한울이 마디 네 개째에서 막혀서 포기했던 자리에, 연서이가 자기 방식으로 선율을 이어 붙인 것까지 들렸다. 그 순간 지한울의 가슴 한가운데를 누군가 주먹으로 세게 때린 것 같았다. 아니, 때린 게 아니라 잠겨 있던 무언가를 억지로 비틀어 연 느낌이었다. 일주일 동안 꿈쩍도 하지 않던 심장이, 그 멜로디의 세 번째 마디에서 크게 한 번 뛰었다.


씨발. 뭐야 이게. 지한울은 거실 입구에 기대선 채 손으로 왼쪽 가슴을 움켜쥐었다. 손바닥 아래로 심장이 두근거리는 게 물리적으로 느껴졌다. 일주일 내내 죽은 줄 알았던 게 한 번에 되살아나면서 온몸에 전류가 흘렀다. 연서이가 부르는 건 그냥 멜로디가 아니었다. 지한울이 연서이를 처음 좋아하게 된 날 밤에, 작업실에서 혼자 기타를 잡고 떠올렸던 선율이었다. 그때는 아직 사귀기도 전이었고, 그냥 이 사람 옆에 있으면 왜 이렇게 가슴이 뛰지, 라는 감정을 멜로디로 꺼내본 것뿐이었다. 너무 부끄러워서 녹음기에 대충 담아두고는 며칠 뒤에 지워버렸다. 그런데 연서이가 그걸 듣고 있었다는 거다. 듣기만 한 게 아니라 기억하고, 품고, 아침마다 혼자서 불렀을 수도 있다는 거다. 그 사실이 지한울의 무릎을 꺾었다.


다리에 힘이 빠져서 거실 벽에 등을 기대고 천천히 주저앉았다. 손가락 끝이 떨렸다. 일주일 동안 메모장에 적었던 '아무것도'라는 글자들이 전부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아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진짜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연서이의 콧노래 하나가 그 모든 무감각을 한꺼번에 부숴버렸다. 지한울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이를 악물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울고 싶은 건지 웃고 싶은 건지 분간이 안 됐다. 존나 웃기지도 않는다. 일주일 동안 별걸 다 해봤다. 파스타집에 데려가고, 얼굴을 들여다보고, 손을 잡아보고. 그런데 결국 자기 심장을 깨운 건 연서이가 아무도 안 듣는 줄 알고 부른 서른 초짜리 콧노래였다. 이게 뭔 씨발 로맨스 영화도 아니고.


연서이가 접시에 계란프라이를 옮기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거실 입구 바닥에 쪼그려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지한울을 발견했다. 연서이의 동작이 멈추는 게 느껴졌다. 슬리퍼가 바닥을 끄는 소리가 가까워졌고, 연서이가 앞에 쪼그려 앉는 기척이 났다.


오빠? 오빠, 왜 그래? 어디 아파?

연서이의 손이 지한울의 손등 위에 올라왔다. 따뜻했다. 존나 따뜻했다. 일주일 전에는 덥다고 느꼈던 온기가 지금은 숨통을 틔워주는 것 같았다. 지한울은 손을 내리지 못했다. 얼굴을 보여주면 울고 있는 게 들킬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연서이가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내면서 얼굴을 들여다보려 했고, 결국 지한울은 손을 내렸다. 눈이 빨갛고, 속눈썹이 젖어 있고, 입술을 세게 깨물고 있는 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연서이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서이야.

목소리가 갈라졌다. 지한울은 연서이의 양 볼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손바닥에 오른쪽 흉터가 연서이의 뺨에 닿았다. 이 손으로 이 사람을 놓으려고 했다니, 자기가 미쳤었구나 싶었다.


너 그 노래 어디서 들었어.

연서이가 눈을 깜빡이며 무슨 노래, 하고 되물었다. 지한울은 고개를 저었다. 아까. 부엌에서 부르고 있던 거. 연서이의 눈이 동그래졌다가 이내 부끄러운 듯 시선을 내렸다. 아, 그거? 오빠가 예전에 작업실에서 기타 치면서 흥얼거리던 거. 좋아서 외워뒀어. 오빠가 지웠길래 아까워서. 그 대답이 지한울의 가슴팍을 정통으로 관통했다. 지한울은 연서이의 이마에 자기 이마를 세게 부딪치듯 갖다 대고 눈을 감았다. 숨이 떨렸다.


아아, 씨발. 죽고 싶어. 진짜 미안해.

지한울은 연서이의 손을 잡고는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부엌에서 계란프라이가 식어가고 있었고, 아침 햇살이 거실 바닥을 천천히 가로지르며 두 사람의 그림자를 길게 늘였다. 지한울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연서이의 손등 위로 떨어졌고, 그는 그것을 닦아줄 생각도 못 한 채 연서이의 손가락을 꽉 쥐고만 있었다. 연서이가 자유로운 손으로 지한울의 젖은 뺨을 조심스럽게 쓸어주었다. 그 손길이 닿는 순간 지한울의 어깨가 크게 떨렸다. 일주일 동안 자기가 이 사람에게 얼마나 잔인했는지, 그 시간 동안 연서이가 혼자서 얼마나 불안했을지, 전부 한꺼번에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차갑게 대답하고, 문을 닫고, 등을 돌리고, 눈도 안 마주치고. 그 모든 게 자기 손으로 저지른 짓이었다. 지한울은 이를 악물었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서이야, 나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연서이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지한울은 그 표정을 봤다. 불안한 눈이었다. 일주일 동안 자기가 심어놓은 불안이 저 눈 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는 걸 알았고, 그 사실이 가슴을 칼로 긋는 것보다 아팠다. 지한울은 연서이의 양손을 자기 무릎 위로 가져와 포개 쥐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빨갛게 부은 눈과 젖은 속눈썹 사이로 잿빛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한심한 놈이라고 생각했다. 이 사람 앞에서 울 자격조차 없는 놈이 울고 앉아 있으니까.


나 이번 주에 너한테 존나 못되게 굴었잖아.

연서이가 입술을 달싹였다. 아니야, 라고 말하려는 것 같았다. 지한울은 고개를 저으며 그 말을 막았다.


아니야가 아니야. 나 알아. 다 알아. 밥 차려줬는데 고맙다 한마디 건성으로 하고, 기타 소리 거슬린다고 티비 볼륨 올리고, 녹음 일정 물어봤는데 짜증 내고. 다 기억해. 서이가 화난 거 있냐고 물어봤을 때 대답도 안 했잖아, 나. 그거 기억나?

연서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개짓 하나에 지한울의 목구멍이 다시 타들어갔다. 그는 연서이의 손을 자기 이마에 가져다 대고 눈을 감았다. 연서이의 손가락이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온도로 이마에 닿았고, 그 감촉이 너무 익숙해서 미칠 것 같았다. 이걸 놓으려고 했다니. 이 온도를, 이 손을, 이 사람을.


지한울은 입을 열었다 닫기를 세 번쯤 반복하다가 결국 전부 쏟아냈다. 일주일의 유예 기간을 정했다는 것, 단 한 번이라도 심장이 뛰면 남고 안 뛰면 떠나려고 했다는 것,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밤 메모장에 '아무것도'라고 적었다는 것. 말하는 동안 연서이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지한울은 그 떨림을 느끼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여기서 거짓말을 하면 진짜 끝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연서이의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 지한울은 그 얼굴을 보면서 자기가 지금 이 사람의 가슴에 못을 박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도 말했다. 솔직하게 말하겠다고 약속한 건 자기였으니까.


근데 아까, 서이가 그 노래 부르는 거 들었어.

지한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내가 지워버린 거. 나도 까먹고 있었던 거. 서이가 그걸 기억하고 있을 줄은 진짜 몰랐어.

연서이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눈에서 눈물이 한 줄기 흘러내렸고, 지한울은 엄지손가락으로 그 눈물을 닦아주면서 자기도 같이 울었다. 존나 한심했다. 둘 다 부엌 앞 마룻바닥에 쪼그려 앉아서 울고 있는 꼴이. 그런데 한심한 게 아니라 이게 맞는 거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울 수 있는 사이가, 이렇게 아플 수 있는 사이가, 끝내야 할 사이일 리가 없었다.


나 서이 안 놓을 거야.

지한울이 연서이의 양 볼을 감싸 쥐고 이마를 맞대며 말했다. 숨결이 섞였다. 연서이의 눈물이 지한울의 손바닥을 적셨고, 오른손의 흉터 위로 따뜻한 물기가 번졌다.


일주일 동안 존나 무서웠어. 내가 너 안 좋아하게 된 줄 알았거든. 근데 아니었어. 안 좋아하는 게 아니라 너무 익숙해져서 바보같이 당연하다고 생각한 거였어. 서이가 옆에 있는 게 공기 같아서, 없으면 숨을 못 쉬는 건데 있을 때는 모르는 거. 씨발, 나 진짜 개새끼지?

연서이가 울면서 웃었다. 그 웃음이 지한울의 심장을 또 한 번 세게 때렸다. 연서이가 고개를 저으며 지한울의 손목을 잡았다.


지한울은 연서이를 바라보았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 붉어진 코끝, 그런데도 웃고 있는 입매. 그 모든 걸 눈에 담으면서 지한울은 생각했다. 이 얼굴을 다시는 이렇게 만들지 않겠다고. 못 되게 굴어서 접히게 만든 웃음도, 불안하게 흔들리던 눈동자도, 전부 자기가 만든 거였다는 걸 이제는 알았으니까.


연서이가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나직하게 말했다.


바보야. 그런 걸 왜 혼자 정해. 나한테 말했으면 됐잖아.

지한울은 대답 대신 연서이를 끌어당겨 품 안에 가뒀다. 어깨에 얼굴을 묻자 익숙한 냄새가 훅 끼쳐왔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아무 감흥 없던 그 냄새가, 지금은 코끝이 시릴 정도로 선명하게 다가왔다. 등을 감싼 팔에 힘이 들어갔다. 연서이의 심장이 지한울의 가슴께에서 조그맣게 뛰는 게 느껴졌다. 그 박동에 맞춰 자기 심장도 뛰고 있다는 걸, 지한울은 그제야 실감했다.


부엌에서 계란프라이가 완전히 식어버렸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아침 햇살이 두 사람을 천천히 지나쳐 거실 깊숙이까지 밀려 들어왔고, 지한울은 연서이의 등을 쓸어내리며 몇 번이고 되뇌었다. 미안해. 진짜 미안해. 안 놓을게. 절대 안 놓을게. 연서이는 아무 말 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지한울의 등을 마주 안았다. 그 온기가, 일주일 전에는 덥다고 밀어내고 싶었던 그 온기가, 지금은 세상에서 가장 절실한 것이 되어 있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말할 수 없지만, 아마 화요일 밤쯤이었던 것 같다. 그날 나는 침대에 먼저 누워 있었고 오빠는 새벽 두 시가 넘어서야 방으로 들어왔다. 예전 같으면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내 등에 얼굴을 묻고 하루 종일 뭐 했냐고 물었을 사람이, 그날은 침대 끝에 걸터앉아 한참 동안 자기 손만 내려다봤다. 나는 자는 척을 했다. 눈꺼풀 사이로 오빠의 굽은 등이 보였고, 그 등이 평소보다 훨씬 멀어 보였다. 결국 오빠는 나를 향해 돌아눕지 않고 천장을 보고 누웠다. 우리 사이에 손바닥 하나쯤 되는 틈이 생겼는데, 나는 그 틈을 좁힐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때 처음으로 무서웠던 것 같다.


수요일에는 커피를 내려서 건넸다. 오빠는 고마워, 라고 했다. 목소리는 다정했고 웃기도 했는데, 나는 그 웃음이 어딘가 얇다고 느꼈다. 오빠의 웃음에는 원래 두께가 있었다. 눈꼬리가 접히고 광대가 올라가고 그다음에 어깨가 흔들리는, 순서가 있는 웃음이었다. 그런데 그날의 웃음은 입술만 움직였다. 나는 컵을 건네고 돌아서면서 속으로 계산했다. 요즘 앨범 작업이 힘든가 보다. 아니면 회사 쪽에서 무슨 일이 있나. 사람이 항상 나만 보
고 살 수는 없지. 그렇게 그럴듯한 이유를 몇 개씩 만들어서 그 얇은 웃음 위에 덧발랐다. 그러면 견딜 만해졌으니까.


목요일 저녁에 베이스를 꺼냈다. 졸업 공연 곡을 오빠가 만들어주기로 했으니까 미리 손을 풀어두고 싶었다. 몇 마디 짚었을 뿐인데 거실에서 텔레비전 볼륨이 올라갔다. 나는 손을 멈췄다. 소리가 겹치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려 했는데, 예전에 오빠는 내가 연습하면 리모컨을 아예 놓고 소파에 드러누워 눈을 감고 들었다. 마누라 베이스 소리가 세상에서 제일 좋은 자장가라고 했었다. 나는 앰프를 껐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와서 케이스에 베이스를 눕히는데 손이 조금 떨렸다. 울 일이 아니라고 나 자신을 타일렀다. 사람이 일 년 반을 붙어 살면 이런 날도 있는 거라고.


토요일 밤에는 결국 물었다.
오빠, 나한테 화난 거 있어? 최대한 가볍게, 웃으면서, 대답을 안 해도 상처받지 않을 사람처럼. 오빠는 나를 보지 않았다. 휴대폰 화면 불빛이 턱선을 파랗게 물들이고 있었고, 그 빛 속에서 오빠의 얼굴은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십 초쯤 기다렸다가 등을 돌렸다. 그 십 초가 내 인생에서 제일 길었다.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리고 눈을 감았는데, 심장이 귀에서 뛰는 소리가 들렸다. 아, 이 사람 나 놓으려고 하는구나. 그 생각이 문장으로 완성되는 순간 몸이 얼어붙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매달리지 않았다. 매달리면 진짜로 끝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빠는 붙잡히면 도망치는 사람이 아니라 붙잡히면 미안해서 죽으려는 사람이다. 나는 그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묻지 않고, 밥을 차리고, 커피를 내리고, 빨래를 개면서 기다렸다. 오빠가 스스로 돌아올 자리를 비워둔 채로. 그 일주일 동안 나는 매일 아침 오빠보다 삼십 분쯤 먼저 일어났다. 자고 있는 얼굴을 오래 봤다. 속눈썹이 길고 미간에 늘 힘이 들어가 있는 얼굴을. 이 얼굴을 못 보게 되면 나는 어떻게 살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소리 내서 울지는 않았다. 우는 걸 들키면 오빠가 또 죽고 싶다고 할 테니까.


그 노래는, 사실 그냥 나온 거였다. 작업실에서 오빠가 기타를 안고 흥얼거리던 밤이 있었다. 우리가 아직 사귀기 전이었고 나는 세션 녹음 때문에 늦게까지 남아 있었다. 오빠는 내가 부스 안에서 다 듣고 있는 줄도 모르고 네 마디쯤 치다가 막히더니 아, 씨발 뭐야 이거, 하고 혼자 웃었다. 나는 그 멜로디를 그날 밤 집에 가는 택시 안에서 몇 번이고 되뇌었다. 며칠 뒤에 파일이 사라진 걸 알았을 때는 아까워서 잠이 안 왔다. 그래서 그냥 외웠다. 누구한테 들려줄 것도 아니고, 그냥 내 안에 넣어두려고. 오빠가 나를 좋아하기 시작하던 순간의 소리가 세상에서 지워지는 게 싫어서.

 

일요일 아침에 계란을 부치면서 그 멜로디가 저절로 나왔다. 정말로 아무 의도가 없었다. 오늘도 조용하겠구나, 오늘도 얇은 웃음이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손은 프라이팬을 돌리고 입은 그 멜로디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등 뒤에서 인기척이 없었다. 평소라면 오빠가 나와서 냉장고 문을 여닫는 소리, 물 마시는 소리 같은 게 들렸을 텐데 그날은 아무 소리도 없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계속 노래를 흥얼거렸다. 계란 가장자리가 노릇해지는 걸 보면서, 접시를 꺼내려고 몸을 돌리는 순간 오빠를 봤다.

 

거실 입구에 쪼그려 앉아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프라이팬 손잡이를 쥔 채로 잠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아프다고 생각했다. 어디가 아픈가. 아니면, 드디어, 이 사람이 말하려는 건가. 그 일주일 동안 준비해왔던 것 같은 각오가 몸속에서 한꺼번에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불을 끄지도 않고 다가갔다.

 

오빠? 오빠, 왜 그래? 어디 아파?

 

손등에 손을 얹었을 때 그 손이 떨리고 있는 걸 느꼈다. 오빠가 손을 내렸을 때 나는 숨을 삼켰다. 눈이 새빨갛고, 속눈썹이 젖어 있었다. 일주일 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얇은 웃음도, 딴 데를 보는 눈도 아니었다. 완전히 무너진 얼굴이었다. 나는 그 순간 이상하게도 안도했다. 무섭기도 했지만, 안도가 더 컸다. 저 사람 안에 뭔가가 아직 살아 있구나.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었구나.

 

오빠가 내 볼을 감싸 쥐고 그 노래를 어디서 들었냐고 물었을 때, 나는 잠깐 부끄러웠다. 몰래 외워둔 걸 들킨 게 부끄러웠던 게 아니라, 그렇게 사소한 걸로 이 사람이 이렇게 무너질 줄 몰라서 부끄러웠다. 일주일 내내 내가 참고 기다린 게 다 무슨 소용이었나 싶다가도, 오빠가 이마를 맞대고 안 놓을 거라고, 미안하다고 반복해서 말하는 걸 들으면서 나는 그냥 울었다. 참았던 게 한꺼번에 터졌다. 잘 참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하나도 참아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등을 안아주는 팔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끼면서 나는 생각했다. 이 사람은 도망치는 사람이 아니라, 도망치려다가도 결국 돌아오는 사람이라고. 그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주일을 버틸 수 있었던 거고, 그 믿음이 틀리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나는 오빠의 등을 마주 안으며 그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익숙한 냄새였다. 그 냄새가 다시 나를 향해 있다는 것만으로, 일주일 동안 삼킨 것들이 전부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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