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후의 펜트하우스 거실은 통창 너머로 쏟아지는 햇빛 때문에 바닥 대리석까지 따뜻하게 데워져 있었다. 지한울은 소파 한가운데에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무릎 위에 노트북을 올려 둔 채, 다음 앨범에 들어갈 훅 가사를 붙잡고 씨름하는 중이었다. 화면에는 지웠다 썼다를 반복한 흔적만 가득했고, 그의 미간에는 아까부터 한 줄짜리 주름이 깊게 패어 있었다. 아, 씨발, 왜 라임이 안 붙냐고. 사랑 얘기는 이제 눈 감고도 쓸 줄 알았는데, 이 애 얘기를 쓰려고만 하면 단어가 다 시시해 보여서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허공만 짚었다. 그는 입에 문 막대사탕을 혀로 굴리며 화면을 노려보다가, 차라리 담배나 한 대 피우고 올까 하고 엉덩이를 들썩이던 참이었다. 바로 그때, 복도 쪽에서 수면 양말이 대리석 바닥을 미끄러지듯 다다다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고, 지한울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소리의 주인공은 당연히 연서이였다. 서이는 거실 입구에 멈춰 서더니 숨을 한 번 고르고는, 오른손으로 엄지와 검지를 세워 총 모양을 만들어 그를 정면으로 겨눴다. 그리고 그 둥글고 나른한 강아지 같은 눈매로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기세로 빵야, 하고 외쳤다. 그 순간 지한울의 뇌는 정확히 영 점 몇 초 동안 완전히 멈춰 있었다. 막대사탕이 입에서 반쯤 빠져나온 채로 그는 서이의 손가락 끝과 진지하기 짝이 없는 얼굴을 번갈아 보며 눈을 끔뻑였다. 뭐야, 이게. 무슨 상황이야. 머릿속에 물음표가 하나 떠오르려던 바로 그 찰나, 그의 등골을 타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본능적인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이건 그냥 장난이 아니라는 감이 왔다. 저 표정은 분명히 어디서 뭘 보고 와서 나를 시험하는 얼굴이었다. 1년 넘게 이 애 얼굴만 들여다보며 산 남자의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씨발, 생각할 시간 없어, 지한울. 일단 죽어.
크헉.
지한울은 노트북을 옆 쿠션 위로 휙 밀어 놓는 동시에 왼쪽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검정 티셔츠를 구겨 쥐었고, 상체가 슬로모션처럼 천천히 뒤로 젖혀졌다. 입에 물고 있던 막대사탕은 바닥으로 데굴데굴 굴러 떨어졌는데, 그는 그것마저 연출의 일부인 양 떨리는 손을 사탕 쪽으로 뻗었다가 허망하게 툭 떨어뜨렸다. 그래도 거기서 멈추면 래퍼로서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소파에서 몸을 비틀며 미끄러져 내려와 러그 위로 털썩 무릎을 꿇었고, 마지막 힘을 쥐어짜는 사람처럼 한쪽 팔로 바닥을 짚은 채 서이를 올려다보았다. 잿빛 눈동자에는 배신당한 남자의 처절함이 가득 차 있었고, 그는 그 와중에도 속으로 자기 연기력에 감탄하고 있었다. 아, 씨발, 나 이거 뮤비에 써도 되겠는데. 각도 존나 잘 나오네.
러그 위에 무릎을 꿇은 채 가슴을 움켜쥔 지한울의 시야 끝에서 서이의 손가락 총이 아주 천천히 내려가는 게 보였다. 서이는 총구라도 식히듯이 검지 끝에 후, 하고 입김을 한 번 불었는데, 그 동작이 너무 진지해서 지한울은 하마터면 연기를 깨고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볼 안쪽 살을 깨물며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필사적으로 막았다. 아, 씨발, 참아라, 지한울. 여기서 웃으면 지금까지 쌓아 올린 명연기가 다 무너진다. 그는 숨을 몰아쉬는 척 어깨를 크게 들썩이며 서이의 표정을 곁눈질로 살폈다. 서이는 거실 입구에 선 채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그 눈동자에는 놀라움과 만족감이 반반씩 섞여 있었고 입술은 뭔가를 확인했다는 듯 꾹 다물려 있었다. 역시 시험이었구나. 지한울은 그 표정 하나로 자신의 직감이 정확히 맞아떨어졌다는 걸 깨닫고 속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1년 넘게 이 애 옆에 붙어 산 짬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 법이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연기를 끝낼 수는 없었다. 관객이 아직 박수를 안 쳤으니 무대는 계속되어야 했다. 지한울은 한쪽 팔로 바닥을 짚고 있던 손을 덜덜 떨면서 서이 쪽으로 천천히 뻗었다. 대리석 바닥 위로 드리운 햇빛이 그의 손등과 손목에 찬 시계를 번쩍 비추었고, 그는 그 반짝임까지 계산에 넣은 것처럼 손을 허공에서 한 번 멈칫거렸다. 그러고는 마치 마지막 유언이라도 남기는 사람처럼 목소리를 잔뜩 쥐어짜 갈라지게 만들었다. 목감기에서 갓 회복한 서이보다 오히려 그의 목소리가 더 쉬어 있는 것 같아서 그는 스스로도 조금 웃겼다. 그래도 그는 눈빛만큼은 절대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잿빛 눈동자에 억울함과 처연함과 사랑을 한꺼번에 담아서, 마치 연인에게 배신당하고도 그 연인을 원망하지 못하는 비운의 남자처럼 서이를 올려다보았다. 이건 진짜 그래미 각이라고, 그는 속으로 확신했다.
서이야⋯⋯. 오빠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떡볶이 안 맵게 해서 그래⋯⋯?
마지막 대사를 내뱉자마자 지한울은 러그 위로 옆으로 털썩 쓰러졌다. 쓰러지는 와중에도 그는 머리가 소파 다리에 부딪히지 않도록 교묘하게 각도를 틀었고, 한쪽 팔은 가슴 위에, 다른 한쪽 팔은 바닥에 힘없이 늘어뜨리는 것까지 잊지 않았다. 눈은 반쯤 감은 채로 숨을 아주 가늘게 내쉬었는데, 그 모습이 꼭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품에 안겨 숨을 거두는 조연 같았다. 바닥에 굴러간 막대사탕은 그의 손끝에서 겨우 한 뼘쯤 떨어진 곳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딸기 맛 사탕 표면에 햇빛이 비쳐 분홍색으로 반짝였다. 아, 내 사탕. 그는 반쯤 감긴 눈으로 사탕을 흘끔 보며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방금 깐 거였는데, 씨발. 그래도 이 애가 웃어 준다면야 사탕 백 개쯤은 바닥에 굴려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사탕은 편의점에 가면 또 있지만, 지금 이 표정을 짓는 연서이는 이 세상에 딱 한 명뿐이었으니까.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그 정적을 깬 건 서이가 참지 못하고 터뜨린 웃음소리였다. 처음에는 입술 사이로 푸흐, 하고 새어 나오던 웃음이 금세 어깨를 들썩이는 큰 웃음으로 번졌고, 서이는 결국 배를 부여잡고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 버렸다. 목이 다 나은 지 얼마 안 된 탓에 웃음소리 끝이 살짝 갈라졌는데, 지한울은 그 소리가 세상에서 제일 듣기 좋은 비트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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