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소리가 먼저 들렸다. 지한울의 의식이 어둠 속에서 떠오르기도 전에, 차갑고 촘촘한 빗줄기가 두피 위를 두드리는 감각이 온몸을 적셔 들어왔다. 눈을 떴을 때 지한울은 자기가 어디에 서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좁은 골목이었다. 양쪽으로 회색 벽이 솟아 있었고, 벽과 벽 사이를 메우는 것은 비와 어둠뿐이었다. 발밑에 물웅덩이가 고여 있었고, 검은색 더비슈즈의 앞코가 이미 젖어 있었다. 후드도 우산도 없었다. 블랙 캐시미어 니트가 빗물을 흡수해 어깨에 달라붙어 있었고, 니트의 무게가 평소보다 무겁게 어깨를 눌렀다. 지한울은 이것이 이상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인식하면서도, 꿈 특유의 둔탁한 논리 안에서는 왜 자기가 여기에 서 있는지를 질문하지 않았다. 비가 내리고 있었고, 골목이 있었고, 걸어야 했으므로 걸었다. 발걸음이 물웅덩이를 밟을 때마다 찰삭, 하는 소리가 골목 벽 사이에서 울렸다.
골목을 빠져나가려던 지한울의 발이 멈추었다. 시야의 왼쪽 구석에 무언가가 보였다. 벽에 기대어 놓인 골판지 박스 하나. 크기는 사람 하나가 겨우 쪼그려 앉을 수 있을 정도였고, 빗물에 젖어 윗면이 살짝 처져 있었다. 박스의 정면에 종이 한 장이 테이프로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그 종이 위에 검은 매직으로 쓴 글자가 빗물에 번져가면서도 읽을 수 있을 만큼 남아 있었다. '데려가세요.' 지한울은 그 글자를 읽었다. 다리가 저절로 박스 쪽으로 움직였다. 꿈이라는 것을 모르는 상태에서도 심장이 빨라지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발밑의 물웅덩이가 더비슈즈 밑창 아래에서 철퍽 소리를 냈고, 지한울은 박스 앞에 무릎을 꿇었다. 바지 무릎이 물에 젖는 것 따위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박스 안을 들여다보았다.
지한울의 심장이 멈추었다. 아니, 멈추지는 않았지만 한 박자를 통째로 건너뛴 것처럼 가슴 안쪽에서 무언가가 뚝,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졌다. 박스 안에 서이가 있었다. 연서이. 지한울의 서이. 무릎을 가슴 앞으로 끌어안고 쪼그려 앉은 자세였다. 크림색 원피스가 아니라 얇은 흰색 옷 한 벌만을 걸치고 있었고, 그 옷은 빗물에 젖어 피부에 달라붙어 있었다. 서이의 검은 머리카락이 볼과 이마에 젖어 늘어붙어 있었고, 머리 위로 검은색 고양이 귀가 축 처진 채 보였다. 허리 뒤쪽에서는 검은 꼬리가 바닥에 늘어져 있었고, 그 꼬리도 빗물에 젖어 끝이 축축하게 바닥에 눌러붙어 있었다. 서이의 회색 눈동자가 물기를 잔뜩 머금은 채 박스 위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눈물이 양쪽 볼 위를 타고 내렸고, 턱 끝에서 떨어진 눈물방울이 서이의 무릎 위에 젖은 자국을 남겼다. 코끝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고, 아래 입술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씨발. 뭐야. 뭐야 이게. 지한울의 머릿속이 폭발했다. 아니, 폭발이라기보다는 모든 사고 회로가 동시에 합선을 일으킨 것에 가까웠다. 서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왜 박스 안에 있는 거지. 왜 저렇게 젖어 있는 거지. 왜 울고 있는 거지. '데려가세요'가 뭐야. 누가 이걸 써 붙인 거야. 누가 서이를 여기에 둔 거야. 갈비뼈 안쪽에서 뜨거운 것이 들끓었다. 분노인지 슬픔인지 공포인지 구분이 안 됐다. 전부 동시에 올라왔다. 누가 서이를 버렸다고? 내 서이를? 내 사람을? 지한울의 턱이 단단하게 잠겼고 어금니가 맞물리면서 관자놀이의 근육이 불거졌다. 이게 진짜라면 그 놈의 팔다리를 분해해도 모자랄 것이었다. 하지만 분노보다 더 강하게 올라온 것은 서이를 향한 처절한 연민이었다. 서이의 젖은 얼굴, 축 처진 고양이 귀, 바닥에 눌러붙은 꼬리, 무릎을 껴안고 지한울을 올려다보는 그 눈. 서이의 눈에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지한울의 심장을 쥐어짰다. 이 세상에서 서이가 울어야 하는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서이가 버림받아야 하는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지한울은 망설이지 않았다. 무릎이 물웅덩이에 잠겨 있었지만 아무 상관이 없었다. 두 팔을 벌려 박스 안의 서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지한울의 오른쪽 손바닥 위에 오래된 흉터가 빗물에 젖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지만, 그 손은 떨리지 않았다. 서이를 향해 뻗은 손은 세상 어디에서 뻗어도 떨린 적이 없었다. 서이의 축 처진 고양이 귀가 지한울의 손이 다가오는 것을 감지한 듯 미세하게 움찔했고, 서이의 젖은 눈이 더 크게 벌어지며 새로운 눈물 한 방울이 속눈썹 끝에 맺혔다.
서이야. 이리 와. 늦게 와서 미안해.
지한울의 목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박스 안까지 닿았다. '서이야. 이리 와. 늦게 와서 미안해.'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지한울의 목젖이 한 번 크게 움직였다. 괜찮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었지만 목구멍 안쪽이 뜨겁게 조여와서 문장이 완성되지 않았다. 비가 지한울의 등과 어깨 위로 쏟아지고 있었고, 검은 캐시미어 니트는 이미 빗물을 한계까지 머금어 무겁게 늘어져 있었다. 지한울은 그 무게를 인식하지 못했다. 눈앞에 서이가 있었고, 서이가 울고 있었고, 서이의 고양이 귀가 축 처져 있었고, 서이의 꼬리가 차가운 물에 잠긴 채 바닥에 늘어져 있었다. 서이의 회색 눈동자가 지한울을 올려다보며 흔들렸다. 그 안에 고인 물기가 빗물인지 눈물인지 구분할 수 없었지만, 지한울은 그게 전부 눈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서이는 비를 맞아도 울지 않는 사람이었다. 서이가 우는 건 마음이 아플 때뿐이었다.
박스 안의 서이가 지한울의 손을 보았다. 지한울의 오른쪽 손바닥 위에 드러난 흉터가 빗물에 젖어 평소보다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서이의 시선이 그 흉터 위에 한 번 머물렀다가, 지한울의 눈으로 올라왔다. 서이의 입술이 벌어졌다. '오, 빠.' 두 음절이 서이의 떨리는 입술 사이에서 빠져나왔고, 그 소리가 빗소리보다 작았는데도 지한울의 고막에는 그것만 들렸다. 서이의 양손이 무릎 위에서 떨어져 지한울의 손 위로 올라왔다. 차가웠다. 서이의 손가락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손끝에서 시작된 한기가 지한울의 손바닥을 타고 팔뚝까지 올라왔고, 지한울의 심장이 갈비뼈 안에서 쿵, 하고 크게 한 번 뛰었다. 씨발, 얼마나 오래 여기 있었던 거야. 이 차가움이 서이의 것이라는 사실이 지한울의 위장을 뒤틀었다. 서이의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 두 개가 차가운 빗물에 젖어 있었는데, 그 반지마저 온기를 잃어버린 것이 지한울을 미치게 만들었다.
지한울은 서이의 손을 잡아당겼다. 부드럽게가 아니라, 거의 끌어올리듯. 서이의 가벼운 몸이 박스에서 빠져나왔고, 서이의 젖은 옷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서이의 고양이 귀가 지한울의 턱 아래에서 스쳤고, 축축한 검은 털의 감촉이 턱뼈에 닿았다. 지한울은 서이를 바닥에 세우지 않았다. 한 팔로 서이의 허리를 감싸고, 다른 팔로 서이의 무릎 뒤를 걸어 서이를 통째로 들어 올렸다. 서이의 머리가 지한울의 어깨와 목 사이에 파묻혔고, 서이의 젖은 머리카락이 지한울의 목을 적셨다. 차가운 물기가 목 아래로 흘러내렸지만 지한울은 서이를 더 단단하게 안았다. 서이의 몸이 너무 가벼웠다. 골판지 박스 안에 쪼그려 앉아 있을 만큼 작고 가벼운 이 사람을, 누가 감히 여기에 두고 갔는가. 지한울의 이를 갈리는 소리가 빗소리 사이에서 날카롭게 울렸다.
서이의 손이 지한울의 니트 앞섶을 움켜쥐었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면서 니트의 짜임새가 당겨졌고, 서이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서이의 어깨가 지한울의 가슴 앞에서 떨리고 있었고, 서이의 흐느낌이 지한울의 쇄골 위에서 진동을 만들었다. 지한울은 서이의 등을 감싼 손바닥에 힘을 주었다가, 서이의 등뼈가 손바닥 아래에서 만져지는 것을 느끼고 힘을 조절했다. 서이의 등이 차가웠다. 옷 한 겹 너머로 느껴지는 서이의 피부 온도가 비정상적으로 낮았고, 지한울은 자기 체온을 전부 서이에게 넘겨주고 싶었다. 빗물이 두 사람의 머리 위로 계속 쏟아지고 있었고, 골목 바닥의 물웅덩이가 점점 깊어지고 있었지만, 지한울은 움직일 수 없었다. 서이가 울음을 멈출 때까지는 여기서 비를 다 맞아도 좋았다. 지한울의 입술이 서이의 정수리 위, 축 처진 고양이 귀 옆에 닿았다. 차갑고 젖은 머리카락의 감촉이 입술에 번졌다.
누가 이랬어. 서이야, 누가 이랬어.
지한울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분노가 아니라 연민이 목소리를 갈라놓은 것이었다. 서이의 고양이 귀가 지한울의 목소리에 반응하여 미세하게 움찔거렸고, 지한울은 그 작은 움직임을 턱 아래에서 느꼈다. 서이가 입을 열려는 것 같았지만, 서이의 입에서 나온 것은 말이 아니라 숨이 끊기는 듯한 흐느낌이었다. 그 소리가 지한울의 심장을 쥐어짰다. 비가 내리는 골목의 공기는 차가웠고, 서이의 몸에서 올라오는 한기가 지한울의 가슴과 팔 전체를 식히고 있었지만, 서이를 안고 있는 지한울의 내면은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분노의 불이었다. 서이를 이곳에 버린 존재를 향한, 형태도 얼굴도 모르는 무언가를 향한, 서이에게 고양이 귀를 달아준 그 실험실의 잔해를 향한 맹목적인 적개심이었다.
지한울은 서이를 안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빗물이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었고, 골목 양쪽 벽 사이에서 빗줄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백색소음처럼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서이의 고양이 귀가 지한울의 턱 아래에서 축축하게 눌려 있었고, 서이의 꼬리가 지한울의 팔뚝 위로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서이의 흐느낌이 점점 잦아들었지만 어깨의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지한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서이의 등을 감싼 오른손이 젖은 옷 위로 서이의 척추 라인을 따라 천천히 쓸어 내렸다. 등뼈 하나하나가 손바닥 아래에서 만져졌고, 그 뼈의 윤곽이 평소보다 선명하게 느껴지는 것이 지한울의 가슴을 졸라맸다. 서이의 체온을 되돌려야 했다. 지금 당장, 어떻게든.
지한울이 서이를 안은 팔에 더 힘을 주며 자기 가슴 쪽으로 밀착시키려던 그 순간, 골목의 풍경이 흔들렸다. 벽이 흔들린 것이 아니라 시야 전체가 물에 번진 수채화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빗소리가 멀어졌다. 서이의 체온이, 서이의 무게가, 서이의 젖은 머리카락이 입술에 닿던 감촉이 전부 한꺼번에 희미해졌다. 지한울은 서이를 더 세게 안으려고 팔에 힘을 줬지만 손가락이 허공을 움켜쥐었을 뿐이었다. 안 돼, 서이 놓치면 안 돼, 씨발, 잡아, 놓지 마. 의식의 표면이 갈라지면서 어둠이 밀려들었고, 지한울의 의식이 꿈의 바닥에서 현실의 수면으로 급격하게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인식한 것은 서이의 회색 눈동자에 맺힌 눈물방울 하나와, 서이의 입술 사이에서 새어 나온 '오빠'라는 두 음절이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사라졌다.
지한울의 눈이 벌어졌다. 천장이 보였다. 어두운 펜트하우스 침실의 천장. 간접 조명이 꺼진 상태에서 창밖의 가로등 빛이 커튼 사이로 가느다란 줄기를 밀어 넣고 있었고, 그 빛줄기가 천장 모서리에 희미한 삼각형을 만들고 있었다. 지한울의 등이 땀에 젖어 있었다. 검은색 반팔 티셔츠의 등 부분이 피부에 달라붙어 있었고,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 한 줄기가 관자놀이를 타고 베개 위로 스며들고 있었다. 심장이 갈비뼈 안에서 발작하듯 뛰고 있었다. 쿵, 쿵, 쿵. 그 박동 하나하나가 귀 안쪽까지 울려 퍼졌다. 지한울은 천장을 바라본 채 숨을 쉬었다. 들숨이 짧고 가팔랐으며 날숨이 제대로 빠져나가지 않았다. 꿈이었다. 꿈이었다. 꿈인 거 안다. 그런데 왜 서이의 차가운 손 감촉이 아직 손바닥 위에 남아 있는 거지. 지한울의 오른쪽 손바닥이 무의식적으로 쥐어졌다가 펴졌다. 흉터 위를 땀이 적시고 있었고, 손바닥 중앙에서 서이의 차가운 손가락이 닿았던 감각이 유령처럼 맴돌았다.
지한울의 고개가 왼쪽으로 돌아갔다. 느리게가 아니라 거의 반사적으로, 목 근육이 의지보다 먼저 움직인 것이었다. 어둠 속에서 서이의 윤곽이 보였다. 서이는 지한울의 왼편에 누워 있었다. 실크 잠옷이 서이의 어깨선을 따라 흘러내려 쇄골 아래까지 드러나 있었고, 서이의 가슴이 고른 호흡에 맞추어 천천히 오르내리고 있었다. 서이의 얼굴은 지한울 쪽을 향하고 있었고, 감긴 눈꺼풀 위로 긴 속눈썹이 볼 위에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입술이 살짝 벌어져 있었고, 그 사이로 고른 숨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고양이 귀가 없었다. 꼬리도 없었다. 축 처진 검은 귀 대신 서이의 검은 머리카락이 베개 위에 부채꼴로 펼쳐져 있었고, 리본은 잠들기 전에 풀어 놓아 머리카락이 자유롭게 풀려 있었다. 서이의 왼손이 베개와 자기 볼 사이에 끼여 있었고, 약지의 반지 두 개가 간접 조명의 잔여 빛을 받아 아주 작은 반짝임을 만들고 있었다. 지한울의 눈이 그 반짝임 위에 고정되었다. 프러포즈 링. 커플링. 서이의 약지 위에 있어야 할 것들이 전부 제자리에 있었다.
지한울의 입에서 숨이 길게 빠져나갔다. 그 날숨에 온몸의 긴장이 조금씩 풀려 나가는 것을 느꼈다. 씨발, 꿈이었어. 꿈이야 이 병신아. 서이는 여기 있잖아. 바로 옆에 있잖아. 따뜻하게, 안전하게, 지한울의 침대 위에서, 지한울이 고른 실크 잠옷을 입고, 지한울이 끼워준 반지를 끼고 자고 있잖아. 아무도 서이를 박스에 넣지 않았고, 아무도 서이를 빗속에 버리지 않았고, 서이의 손은 차갑지 않으며, 서이의 귀는 축 처지지 않았다. 지한울의 심장 박동이 천천히 제 속도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손바닥 위의 유령 같은 한기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지한울은 몸을 돌려 서이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지한울의 손이 이불 위를 더듬었다. 손끝이 실크 잠옷의 매끄러운 표면에 닿자 손가락이 멈추었고, 그 감촉이 손바닥 위에 남아 있던 꿈속의 한기를 덮어씌우듯 지워 나갔다. 지한울은 손을 옮기지 않았다. 서이의 허리 위에 손을 얹은 채로 서이의 호흡을 손바닥으로 느꼈다. 들숨에 갈비뼈가 벌어지며 허리가 미세하게 부풀었다가, 날숨에 다시 가라앉는 리듬이 반복되었다. 그 리듬이 일정했다. 끊기지 않았다. 서이가 숨을 쉬고 있었다. 따뜻한 공기를 들이마시고, 따뜻한 공기를 내뱉고 있었다. 차가운 빗물도, 젖은 골판지 박스도, 축 처진 고양이 귀도 이 방 안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하는 것은 서이의 체온과, 서이의 숨소리와, 서이의 실크 잠옷 아래에서 고르게 뛰는 심장뿐이었다. 지한울은 그 심장 박동이 손바닥까지 전해지는 거리로 서이를 천천히 자기 쪽으로 당겼다.
서이의 몸이 이불 위에서 소리 없이 미끄러지듯 지한울 쪽으로 가까워졌다. 서이의 이마가 지한울의 쇄골 바로 아래에 닿았고, 서이의 코끝이 지한울의 가슴 위에서 고른 숨결을 밀어냈다. 그 숨결이 땀에 젖은 티셔츠 위로 번지며 미지근한 온기를 만들었다. 지한울은 팔을 서이의 등 뒤로 돌려 서이의 어깨뼈 사이를 감쌌고, 다른 손은 서이의 머리 뒤에 올려 풀어헤친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마른 머리카락이었다. 비에 젖지 않은, 샴푸 냄새가 희미하게 남아 있는, 서이의 머리카락이었다. 지한울의 코끝이 서이의 정수리에 닿았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서이한테서만 나는 냄새가 폐 깊숙이 밀려들어왔고, 그 냄새가 꿈의 잔상을 하나씩 걷어냈다. 빗물 냄새 대신 서이의 체취가, 골목의 찬 공기 대신 침실의 따뜻한 공기가, 골판지의 축축한 감촉 대신 실크의 매끄러운 감촉이 지한울의 오감을 전부 다시 채웠다.
서이가 잠결에 움찔거렸다. 몸이 지한울의 가슴 쪽으로 당겨진 것을 의식한 듯 서이의 손가락이 지한울의 티셔츠 앞섶을 더듬었고, 무의식적으로 천을 쥐었다. 그 작은 반사 행동이 지한울의 심장을 세게 쥐어짰다. 잠들어 있는데도 나를 잡으려 한다. 이 손가락이, 이 작은 손이, 잠결에도 나를 놓지 않으려 한다. 지한울은 서이의 손 위에 자기 손을 포갰다. 서이의 손이 따뜻했다. 꿈속에서 얼음처럼 차갑던 손가락이, 현실에서는 잠의 열기를 머금어 부드럽고 따뜻했다. 지한울의 엄지가 서이의 약지 위를 쓸었고, 손톱 끝에 반지의 단단한 금속 테두리가 걸렸다. 있다. 제자리에 있다. 지한울은 눈을 감았다.
⋯⋯서이야.
지한울의 입술이 서이의 이마에 닿았다. 서이를 깨울 정도의 압력이 아니라, 피부 위에 입김이 번지는 정도의 가벼운 접촉이었다. 서이의 이마가 따뜻했다. 그 온도가 지한울의 입술을 타고 턱을 타고 목을 타고 가슴 안쪽까지 흘러들었고, 가슴 한가운데에서 아까까지 발작하듯 뛰던 심장이 마침내 고른 박동을 되찾기 시작했다. 서이가 여기 있다. 빗속이 아니라 여기, 지한울의 팔 안에, 지한울의 이불 안에, 지한울의 집 안에 있다. 아무도 서이를 어디에 놓고 가지 않았고, 아무도 서이를 데려가지 않았으며, 서이는 스스로 여기에 있기를 선택한 것이다. 지한울의 눈꼬리가 내려갔다. 입술이 서이의 이마에서 떨어졌고, 코끝이 서이의 머리카락 위에 묻혔다.
지한울은 서이를 안은 채 눈을 감았다. 심장 박동이 느려지고 있었다. 서이의 심장 박동과 지한울의 심장 박동이 가슴과 가슴 사이에서 서로 부딪히며 하나의 리듬으로 합쳐지는 것을 느꼈다. 서이의 고른 숨소리가 자장가처럼 귀를 채우고 있었고, 서이의 체온이 지한울의 식은땀을 전부 녹이고 있었다. 어둠이 무섭지 않았다. 꿈이 다시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았다. 눈을 뜨면 서이가 있을 테니까. 언제나 여기에 있을 테니까. 서이가 그렇게 약속했고, 지한울은 그 약속을 믿었다. 지한울의 팔이 서이의 등 위에서 느슨하게 풀리지 않은 채로, 서이의 체온 속에 가라앉듯, 지한울의 의식이 다시 수면 아래로 천천히 내려갔다. 이번에는 비가 오지 않는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이번에는 서이가 웃고 있는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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